조성경 명지대 교수·에너지공학

지난 8월 초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신규 원전(原電)의 건설·운영 허가와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 승인을 잠정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에선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얼핏 '미국도 탈(脫)원전으로 가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뉴스였다.

그러나 NRC의 결정은 자발적인 게 아니라 법원 판결에 밀린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지난 6월 미국 연방법원은 2010년에 개정된 NRC의 핵폐기물신뢰성원칙(WCD)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1984년 처음 공표된 신뢰성 원칙은 새 원전을 세우거나 기존 원전 수명을 연장할 때는 원전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의 안전한 처분 계획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이다. 원래는 '핵폐기물은 원전의 수명 이후 30년까지 원전 내에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영구 처분해야한다' '영구 처분 시설의 완공은 2007~ 2009년까지 끝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2009년 유카마운틴 영구 처분 시설 건설 계획이 거센 반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백지화되고 말았다. 그러자 NRC는 2010년 영구 처분 시설 건설 시한을 '필요한 때'로 개정했다. 사용후핵연료의 원전 내 보관 기간도 60년까지로 늘려 잡았다. 지난 6월 법원 판결은 이것이 무효라고 규정한 것이다.

원전 28기의 신규 건설과 수명 연장에 대한 심사가 진행 중인 미국에선 NRC의 결정에 따라 사용후핵연료에 대해 신뢰할 만한 처분 계획이 나오지 않는 한 면허 발급은 중단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핵폐기물에 대한 부담을 미래 세대에게 떠맡겨선 안 된다는 미국 에너지 정책의 방향 전환이다.

우리는 고리·울진·월성·영광의 원전 대지 안에 사용후핵연료 3900~34만 다발을 임시 저장하고 있다. 각각의 임시 저장 시설은 2016~2021년에 가득 차게 된다. 지금보다 더 조밀하게 저장하고 건식 저장 시설을 추가로 설치하면 2024년까지는 버틸 수 있다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부터 12년 이내에 사용후핵연료를 모아 따로 보관할 수 있는 중간 저장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규모와 방식·장소를 정하고, 주민과 소통하고, 건설하는 데 걸리는 기간을 생각하면 지금 서둘러 시작해도 될지 말지 하는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있다.

사용후핵연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한지는 지난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봤다. 더구나 사용후핵연료는 원자로에서 꺼낸 뒤 수백 년, 수천 년 이상 계속 보관해야 하는 물질이다. 핵폐기물에 관한 신뢰할 만한 처분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원전의 신규 건설을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전문가들과 지역 의회 대표들로 구성된 사용후핵연료정책포럼이 며칠 전 "2024년까지 사용후핵연료 중간 저장 시설을 완공해야 한다"는 대(對)정부 권고를 했다. 작년 11월 구성된 이 포럼에 참여해 활동하면서 우리가 그간 시간을 허비해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원자력위원회가 중·저준위 처리 시설을 먼저 짓고 고준위 핵폐기물에 대해선 따로 대책을 마련하기로 결정한 것이 2004년 12월이었다. 이후 사용후핵연료 처분 대책을 준비해왔어야 했는데 8년이란 세월을 허송하고 말았다.

이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더 늦지 않게 핵폐기물의 임시 저장을 포함한 중간 저장과 영구 처분의 안전성에 대한 기술적 근거를 마련하고 국민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다음에 비로소 중간 저장을 어디에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 국민이 원전을 원하고, 에너지 공급원으로 원전이 꼭 필요하다 하더라도 핵폐기물 문제를 풀지 못하면 우리는 원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핵폐기물 관리의 해법을 마련하는 문제를 뒤로 늦춰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