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 닿는 곳 어디든 화교(華僑)가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군인 3000명과 상인 40명을 보낸 것이 한국 화교의 효시이다. 올해로 딱 130년의 시간이 흘렀다.
1884년 4월 청국 조계지가 설정된 이후 1910년 한일병탄 직전까지 중국인들은 서해를 건너 물밀 듯 들어왔다. 1만1800여명까지 증가했는데 인천에만 2800여명이 거주했다. 중국을 오가는 정기 여객선 이통환(利通丸)이 제물포에 닿으면 두꺼운 호떡을 마치 탄대처럼 들쳐 멘 중국 남자들이 새까맣게 내렸다. 초기 그들은 대부분 석공으로 일을 했다. 그들 손에 의해 홍예문은 물론 서울의 중앙청, 명동성당 등이 축조되었다.
어딜 가든 중국인들의 짐 보따리에는 세 종류 칼이 들어 있다고 한다. 조선으로 건너 온 그들은 나중에 대부분 요리사, 이발사, 포목상으로 돈을 벌었다. 간혹 본국과의 교역으로 큰돈을 번 거상이 출현하기도 했다. 구한말 한·청 무역을 휘어잡았던 동순태가 대표적인 무역상이었다. 구한말 고종은 내탕금이 궁할 때 그들에게 빌려서 사용했고 조정에서도 공금을 차용했을 만큼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급 화상(華商)이었다.
중국인들이 많이 살던 동네는 지금의 선린동(북성동)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지나정(支那町)'이라고 불렀다. 1930년 중국 영사관은 이 명칭이 중국의 국체를 무시한 것이라 하여 정정을 요구했고 인천부윤(지금의 시장)은 이를 받아들여 '서정'으로 개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고 '미생정(彌生町)'으로 명명되었다.
행정명보다는 흔히 '청관(�]館)'이라고 불리던 이 중국인촌이 크게 위험에 빠진 적이 있다. 1931년 5월 하순 중국 창춘 근교 만보산에서 수로 개설문제로 조선 농민들과 중국인들이 크게 충돌했다. 이 소식을 바다 건너에서 전해들은 인천부민들은 분풀이로 화교들을 습격했다. '인천개항 100년사'에 의하면 7월 3일 화교들이 경영하는 시내 음식점, 이발소 등이 습격당했고 100여명의 화교가 다쳤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중국인들은 청관 안으로 급히 피신했고 자위단을 조직해서 이에 맞섰다.
습격과 약탈이 전국으로 번지자 7월 6일 수많은 화교들이 고향으로 가기 위해 인천항에 정박한 이통환에 서둘러 몸을 실었다. 7월 15일 피난 중이던 화교를 보호하기 위해 중국 군함 두 척이 인천에 입항했다. 이후 인천객주조합, 포목상조합 등은 청관을 찾아가 화교들을 위문했고 인천부(지금의 인천시)에서도 위문금 500원을 전달하는 등 사태는 빠르게 수습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인천 화교들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의 조국 중화민국이 승전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과 맞섰던 '적국의 국민'에서 '연합국의 국민'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미군청의 호위 아래 본토와의 무역도 다시 활발해졌다. 무엇보다 인천 전체 적산가옥 4500채 중 11%가 화교들에게 불하되는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6·25전쟁이 발발했지만 일부 화교들은 청관을 떠나지 않았다. 인천을 탈출했다가 다시 돌아온 시민들은 화교들이 공산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그러나 화교 청년 40여명은 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해 중공군과 맞서 싸웠고 그 중에는 금성무공훈장을 타고 후에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도 있다.
1960, 1970년대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여러 가지 정책으로 인해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식들을 대만으로 보냈다. 대만교육부에서는 매년 6월 한국으로 건너와 화교들을 대상으로 대만 대학 입시를 주관했다. 인천의 당면 공장 노동자의 딸 이수영도 그 중 한명이었다. 1944년 인천에서 출생해 화교학교를 다니다 13세 때 대만으로 건너가 대북국립예술전문학교 음악과에 재학 중이었다. 18세의 그녀는 1961년 미스 차이나에 뽑혔고 그해 런던에서 열린 미스 월드에서 2위로 입상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준(準)미스월드에 뽑힌 것이다. 1962년 1월 25일 이수영은 김포공항으로 금의환향했다. 자유중국 대사 부부, 화교 200여명, 미스 코리아 진선미 등 많은 사람이 환영 나왔고 인천시민회관에서는 미스 차이나의 밤이 성대하게 열렸다.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수교를 맺었다. 자유중국 대만과는 단교가 되었다. 인천의 화교들은 한국과 중국 대륙의 정치 풍향에 따라 '인천인'으로 혹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