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지난 17일 장성택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과 만나 북·중 경협 활성화를 위해 북한이 개선해야 할 점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얘기했다. 정부 관계자는 "중국 총리가 북한 실세를 앉혀놓고 손가락을 꼽아가며 훈계조로 얘기한 셈"이라며 "그동안 북·중 경협 과정에서 쌓인 불만을 표출한 것"이라고 말했다.
①법률·법규 개선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원 총리는 장성택에게 우선 법률과 법규 개선을 요구했다. 이는 북한에 투자했다가 돈을 떼이는 등 각종 불이익을 받는 중국 기업이 급증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는 분석이다. 북한 소식통은 "중국 기업들은 북한과 상사(商事) 분쟁이 발생해도 이를 해결할 북한의 법규가 없는 점을 지적해왔다"며 "원 총리의 '법규 개선' 언급은 이를 의식한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중국 500대 기업 중 하나인 시양(西洋)그룹은 2006년 북한 옹진철광에 2억4000만위안(약 430억원)을 투자했다가 투자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한 채 쫓겨난 사연을 이달 초 공개했다.
②지방정부 간 협조 강화
원 총리는 둘째 요구 사항으로 '상관 지구 간의 연계와 협조 강화'를 들었다. 북한 소식통은 '상관 지구'란 표현에 대해 "북한과 중국의 지방정부를 일컫는다"고 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 지방정부 관리들로부터 각종 급행비 명목으로 뇌물을 요구받았다는 중국 기업이 적지 않다"며 "음성적 방법으로 기업 돈을 뜯지 말고, 당초 지방정부 간에 합의한 대로 하자는 뜻으로 보인다"고 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중국 중앙정부 차원의 '과감한 투자 약속'을 요구해온 북한에 대해 '중앙정부 차원의 투자는 없다. 지방정부끼리 알아서 하라'는 대답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③토지·세금에 시장 시스템 적용
원 총리가 장성택에게 주문한 셋째 내용은 '시장 시스템을 적용해 토지·세금 분야에서 좋은 조건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이는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북한의 세금과 토지 이용료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북측은 작년 9월 시양그룹에 갑자기 토지 임대료, 공업용수 사용료, 자원세 부담 등을 요구했으며, 시양그룹이 이를 거부하자 계약을 파기했다.
④기업 애로 사항 해결
원 총리는 넷째 요구 사항으로 '투자 기업들을 위해 실제 문제와 애로 사항을 해결할 것'을 언급했다. 정부 관계자는 "원 총리가 앞서 언급한 법규, 지방정부, 토지·세금 문제 외에 중국 기업들이 북한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상사 분쟁을 북한이 당국 차원에서 해결해 주겠다는 의지를 보여달란 뜻"이라고 말했다.
⑤세관·품질관리 서비스 개선
원 총리는 마지막으로 세관과 품질관리 서비스의 개선을 주문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개성공단 가동 초기에 우리가 북측에 줄곧 제기하던 내용"이라고 말했다. 세관 문제에 관해 북한은 북한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해 전수조사 방식을 고집한다. 이 당국자는 "통관 방식은 샘플(표본) 조사가 국제적 표준"이라며 "전수조사를 하다 보면 통관이 너무 지연돼 전반적인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품질관리에 대해서도 이 당국자는 "사회주의에 젖은 북한 노동자들은 할당량을 채울 생각만 하고 품질은 안중에도 없다"며 "북한 노동자들을 써 본 중국 기업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했다.
정부 관계자는 "결국 이 다섯 가지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본격적인 대북 투자는 어렵다는 뜻"이라며 "장성택의 방중은 북한을 바라보는 중국의 뿌리 깊은 불신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북한 매체들은 원 총리가 언급한 이 다섯 가지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