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골프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오픈에서 대역전 우승 드라마를 펼쳤던 남아공 골퍼 어니 엘스를 보면서 2년 전 제주에서 만났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국내에서 열리는 유럽 프로골프 투어 발렌타인 챔피언십 라운드를 마치고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헐렁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느긋하게 인터뷰에 응하던 그에게 아들 벤 이야기를 묻자 갑자기 기자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자폐증인 아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 금세라도 큰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릴 것만 같았다. 이런 질문이 처음이 아닐 텐데도 그는 몹시 힘겨워했다. 화제를 돌릴까 생각하는 순간 숨을 한 번 몰아쉰 그가 입을 열었다.
"태어난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예요. 처음엔 말문이 늦게 트인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느낌이 달랐어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자폐증 증세와 비슷한 점을 발견했죠. 그래서 아내와 함께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는데 진단이 다 제각각이었고 그래서 더 괴로웠죠…." 그는 얼마 뒤 요트를 타다 대형사고로 무릎을 다쳐 골프 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키 191㎝의 거구에 스윙이 물 흐르듯 부드럽다고 해서 '빅 이지(big easy)'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엘스는 인생도 술술 풀리던 사람이었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1년에 수백만달러를 벌어들이는 정상급 골퍼가 됐고, 다정한 아내에 와인 사업도 크게 벌였다. 큰딸은 머리도 좋아 늘 A학점만 받아왔다. 주변의 부러움을 살 만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마흔두 살이 돼서 그가 10년 만에 다시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아들 벤의 힘이었다.
이제 아홉 살이 된 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빠가 골프 스윙을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골프 클럽이 공을 때리는 소리, 그 순간 아빠의 표정, 공이 날아가는 궤적을 몰입해서 바라보면서 벤은 더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 뒤로 엘스에게 골프는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웃음을 주는 아빠의 소중한 시간'이 됐다. 골프백에는 자폐증에 대한 인식 확대와 연구 증진을 목표로 하는 단체 'Autism Speaks'의 로고를 붙였고 자선골프 대회도 매년 열고 있다.
엘스는 강풍이 몰아친 브리티시오픈의 바닷가 골프장 마지막 몇 홀에서 전성기 시절보다도 더 뛰어난 경기를 했다. "대회장에 함께 오지 못한 벤이 TV로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경기했다"고 했다. 그보다 더 좋은 성적으로 출발한 선수들이 꼭 우승하고 싶다는 중압감으로 모두 뒷걸음친 그곳에서 아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기대하면서 눈앞의 공 하나에만 집중했던 엘스는 마지막 순간 우승컵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우승보다도 아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던 것을 더 기뻐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는 엘스 못지않게 수많은 난관을 뚫고 온 세계의 올림피안들이 자리를 빛낼 것이다.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힘겹게 4년을 준비하며 달려온 선수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그들을 지탱해 준 정신적 힘이 세계를 감동시키는 명장면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