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38년 만에 찾아온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우리 원자력 산업의 도약 여부가 달렸다고 말한다. 50년 전의 후진국 한국이 IT와 자동차, 조선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뒀듯, 미래 원전시장의 강국이 된다는 비전을 전제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법·제도를 갖추고, 다국적 협력을 넓혀나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서울대 황일순 교수(원자핵공학과)는 "일본·프랑스 등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일찍 시작한 나라들에선 미숙한 기술 탓에 고준위 폐기물이 대량으로 만들어졌고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고준위 처분장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기존 재처리 기술의 단점을 개선해 고준위 폐기물을 아예 중저준위 폐기물로 전부 바꿔버리는 기술의 개발은 미국 같은 원자력 선진국에도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황 교수는 "한국이 미국에 이런 기술의 개발을 목표로 한 공동연구를 제안한다면 미국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며 "양국이 합심해 획기적인 재활용 기술을 내놓는다면 두 나라 모두에게 큰 이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이런 시설을 한국에 두려면 "핵(核) 비확산 기본법을 공표하고 교과서에 이를 수록해 미래 세대가 배우도록 하는 등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한 한국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양대 김경민 교수(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우라늄 농축은 할 수 있으면 좋지만 외교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재활용과 달리 농축은 '산업적 목적'이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주변 국가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극복할 대안으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끼리 다국(多國) 공동으로 농축 산업화단지를 운영하고, 그 부지를 제공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한미가 공동으로 연구개발한 친환경 재활용 기술을 인센티브로 제공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만약 동북아에서 이 모델이 성공한다면, 한국은 다른 지역의 원자력 선진국들과도 협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차세대 재활용 기술의 개발에 드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원자력 산업화 모범국은 무시당하고, 벼랑 끝 전술을 쓰는 불량 국가는 기득권을 인정받는 왜곡된 원자력 질서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세계 5위 원전대국인 한국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을 계기로 국가 간 협력을 강화해나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사진은 2013년 9월 완공을 목표로 건설 중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신고리 3호 원자로 APR-1400. 한국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차세대 신형 원자로로, 같은 모델이 UAE에 수출될 예정이다.

KAIST 임만성 교수(원자력 및 양자공학과)는 "미국은 1979년 스리마일 원전사고 이후 신규 원전 건설이 중단되면서 원전산업의 경쟁력이 쇠퇴해 수출 시장 개척을 위해서는 한국 같은 파트너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처지를 이용해 산업 차원에서 협력의 폭과 깊이를 더해간다면 원자력 분야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황일순 교수는 "일본의 도시바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했듯이 한국도 미국의 원자력 기업을 인수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고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도전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적인 산업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야말로 국제사회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전자산업의 4배, 식품 산업의 2배에 이르는 세계 에너지 산업에서 일본·프랑스를 따라잡으려면 미국 원자력 산업계와 인수·합병을 포함한 과감한 파트너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이은철 교수(원자핵공학과)는 "세계 5위의 원전 선진국인 한국의 위상과 기술력 발전에 걸맞은 지위를 보장받으려면, 한 번 맺으면 수십년 족쇄로 작용하는 협정 방식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40년으로 돼 있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주기를 10년 정도로 줄이자는 것이다. 특히 사용후핵연료가 매년 700t씩 나오는 한국으로서는 대안적인 재활용 기술을 찾는 다양한 시도를 위해서라도 협정 주기를 줄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한미 협상을 비롯한 다양한 원자력 이슈를 총괄 조정할 '컨트롤 타워'의 존재다.

정부가 미국과 원자력 협상을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010년이었다. 협정 만료시한인 2014년 3월을 4년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반면 일본은 2018년 만료되는 미·일 원자력협정 개정에 대비해 이미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는 국가 간 협정의 만료 시점이 임박해서야 청와대를 주축으로 협상팀이 꾸려지는 게 보통”이라며 “그나마 핵 비확산은 외교부가, 기술은 교육부가 따로따로 맡고 있어 부처 간 협력도 원활치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