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슬픔 어린 추억 있었지. 청바지를 즐겨 입던 눈이 큰 아이…." 지난 12일 오후 6시쯤 안양시 동안구 비산3동 안양종합운동장 빙상경기장 옆. 적재함을 개조해 간이 무대로 만든 트럭 위에서 반팔 셔츠 차림의 중년 남성 2명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무명 가수의 자선공연 정도로 여기고 지나치던 주민들도 멋진 화음에 이끌려 모여들었다. 트럭에 붙은 '제1회 주민참여예산 제안대회'라는 플래카드가 공연의 목적을 짐작하게 했다.

이날 무대에 선 통기타 듀엣은 '철근과 콘크리트'라는 특이한 이름을 갖고 있다. 바로 비산3동 주민센터의 강철근(56) 동장과 김융배(49) 사무장이다. 실제 업무도 서로 협조하며 밀고 끄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는 동료이기도 하다. 이날 두 사람은 노래 10여곡을 부르며 자칫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는 행사의 분위기를 돋웠다. 덕분에 주민 200여명이 참여해 7개 현안사업에 대해 찬반 의견을 내며 동네 축제가 됐다.

듀엣‘철근과 콘크리트’를 결성해 활동하는 안양시 비산3동 강철근 동장(왼쪽)과 김융배 사무장이 지난 19일 주민센터 지하실에서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서로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같은 부서에서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회가 없었지요." 두 사람은 각각 1980년, 1989년부터 안양시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난 2010년 10월부터 비산3동 동장을 맡은 강씨는 작년 2월 인사 발령으로 김 사무장이 함께 근무하게 되자 무릎을 쳤다. 그래서 자연스레 듀엣을 결성했다. '철근과 콘크리트'는 강 동장의 이름을 따서 재미 삼아 지었지만, 주변에서 외모나 음성에서 강약이 조화를 이루는 두 사람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한다.

경기도 안성 출신인 강 동장은 중학교 3학년때 독학으로 기타를 익히면서 음악에 빠져들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본 직후였던 1974년 4월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주 장원도 차지했다. 동네 형님과 듀엣으로 어니언스의 '작은 새'를 불러 상품으로 14인치 흑백 TV를 받았다. 1988년 전국노래자랑 안양시편에 같은 멤버, 같은 노래로 최우수상을 받는 진기록도 만들었다. 아들(30)도 KBS '탑 밴드' 프로그램의 8강까지 진출한 인디밴드 '로맨틱 펀치'의 기타리스트로 활약하며 색다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김 사무장은 17년째 주말마다 거의 빠짐없이 고향인 충남 서산으로 내려간다. 농사도 짓고, 고향집 방을 개조해 만든 나름대로 근사한 음악실에서 스트레스도 푼다. 드럼 등 악기에다 음향시설도 마련했고, 자주 활용하는 간이무대도 1.4t 트럭을 개조해 만들 정도로 열의가 넘친다. 그도 역시 까까머리 학창시절에 기타를 친구 삼아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지금도 초·중·고 동문회의 밴드 마스터로 매년 무대에 서고, 안양지역 문화예술인들과 '문화예술사랑회'라는 모임도 꾸려가고 있다.

지난 12일 안양시 비산3동에서 열린 주민참여예산 제안대회에서‘철근과 콘크리트’가 공연을 하고 있다.

'철근과 콘크리트'는 결성되자마자 두루 무대를 마련하고 있다. 가끔 일과 이후에 주민센터 지하 창고에서 연습도 한다. 근무처인 비산3동이 역시 주요 활동무대이다. 작년에는 동네 경로잔치, 주민자치 프로그램 발표회에서 축하 공연을 했다. 주민들이 마련한 '사랑의 일일찻집'에 출연해 콘서트를 갖기도 했다. 올해 4월에는 카페를 빌려서 지인 등을 초대해 3시간 동안 라이브 콘서트도 열었다. 동네 주민들의 야유회는 물론 생일잔치에 으레 기타를 들고 나선다. 강 동장은 "홀몸 노인의 생일잔치에서 축가와 함께 추억의 노래를 불러 드리면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본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음악 동료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강 동장은 "김 사무장은 성량이 좋은데다 장비 욕심도 많아 풍성한 음악활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며 "그동안 그저 취미 정도로 생각했는데, 요즘은 몰입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준다"고 했다. 김 사무장은 "동장님은 평소에는 말이 적고 차분하시지만 무대에 서면 애드립도 던지며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며 "기타도 잘 다루고 화음을 잘 넣으시기 때문에 노래는 함께 부르면 훨씬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 사무장은 "주말에 동장님과 함께 고향 서산을 찾아 연습실에서 저녁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흥에 겨워 노래만 부르며 밤을 새운 적도 있다"며 "7080 세대의 포크송을 중심으로 약 100곡 정도의 레퍼토리도 축적했다"고 말했다. 강 동장은 "옛날이라면 공무원이 딴짓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겠지만, 오히려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요즘은 동네에 행사가 있으면 출연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