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이 19개월째 협상 중인 미사일 사거리·탄두 중량 협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결과는 미국의 이해 속에 이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1979년 맺어진 후, 33년간 유지돼 온 '한미 미사일 지침'은 더 이상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그럼에도 한미가 이번 협상에서 미사일 지침의 무효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면 이 지침의 시효(時效)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재의 미사일 지침은 구속력 없이 양국 사이에 교환된 서한 형태이기에 어떤 시한(時限)이 정해져 있지 않다.
미국은 2015년 12월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으로 넘겨줄 계획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2015년 말을 기점으로 미사일지침의 시효를 5년 더 적용하도록 한 뒤 2020년에 자동소멸되도록 하자는 주장이 적잖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한반도 안보환경의 중대한 변화에 맞춰 효력을 정지시키는 규정이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시작전권 이양 후 이 체제가 안정적으로 운용되는지를 점검하는 데도 5년이면 충분하다는 게 중론이다.
우리가 전시작전권을 가진 후, 추가 협상을 하지 않더라도 미사일 지침의 효력이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북한의 불안정한 내부 사정을 감안할 때 지침에 시효를 두는 것이 통일 대비 전략에도 바람직하다. 미사일 강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우리가 통일 이후까지 이 지침의 영향을 받아서는 곤란하다는 견해가 압도적이다.
미국은 최근 협상에서 우리나라의 탄도 미사일 사거리를 2001년 개정한 300㎞에서 550㎞로 늘릴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주장해 온 ‘트레이드 오프(사거리가 늘어날 때 탄두중량을 줄이는 개념)’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입장도 시사했다고 한다. 리온 패네타 미 국방장관이 지난달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외교·국방장관(2+2)회의에서 “(미사일 사거리 연장협상은) 상당한 진전을 이룬 상태”라고 밝힌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일본·북한이 모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가진 상황에서 250㎞의 사거리 연장을 시혜처럼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많은 전문가는 유사시 우리가 남해안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사거리가 최소한 1000㎞ 이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근무한 정규수 박사는 "한국이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쏠 수 있는 미사일 사거리를 확보한다고 해서 미국에 맞먹는 수준의 미사일 능력을 갖춘 중국이 위협을 느끼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동북아의 안보상황이 불안정하게 진행될 경우, 주변국가와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사거리가 필요하다(민간연구기관 연구원)"는 견해도 있다.
탄두 중량 역시 현재 500㎏의 두 배인 1t은 돼야 의미 있는 공격력을 가질 수 있다는 분석이 많이 나온다.
탄두 중량 500㎏은 미국과 구(舊)소련이 핵탄두 최소중량으로 판단했던 무게인데, 핵무기가 없는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수치다.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의 권세진 교수는 "미사일 파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재보다 사거리가 늘어날 경우, 탄두 중량을 적어도 1t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 미사일 지침은 민간 로켓 기술과 관련된 규제가 3분의 1 이상이다. 우리나라의 우주개발이 바로 이 지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항공우주업계에서는 "미사일 지침에서 군용 미사일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우주개발을 위해서는 민간 분야와 관련된 내용은 완전히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미사일 지침에는 고체로켓은 초당 100만파운드 추력(推力) 이상의 발사체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이 개발하는 우주로켓은 모두 액체 로켓이 될 수밖에 없다. 선진국들이 필요에 따라 고체와 액체 로켓을 선택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아예 선택권이 박탈된 것이다.
이와 함께 21세기의 새로운 공중전(空中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인(無人)정찰·공격기에 대한 제한이 없어져야 한다. 주변국가가 경쟁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무인기에 대해서까지 탑재중량 500㎏을 유지토록 하는 것은 "손발을 꽁꽁 묶어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협상에서 미사일 지침상 연구개발 제한은 완전히 철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001년 개정된 미사일 지침은 연구개발을 무제한으로 허용하면서도 실제 제작은 일부 부품 수준(하부 체계)에서만 가능토록 해 사실상 서류상 연구개발만 가능토록 했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전문가는 “미사일을 생산해 배치하는 단계에선 사거리 및 탄두 중량에 제한을 한다고 하더라도 연구개발에까지 제한을 둬선 안 된다”고 말했다.
또 한미 미사일 협상에서 미국 측은 기술분야에 밝은 미사일 전문가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청와대·외교부·국방부 관계자 중심으로 협상단이 구성돼 미사일 전문가 참여가 미흡한 것도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과 달리 협상팀이 자주 바뀌는 것도 문제다.
한미 미사일 지침이 국가적인 문제로 제기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가 미국 무기 위주의 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79년 한미 양국이 미사일 관련 서한을 교환한 후로는 사실상 미국의 미사일 기술에 ‘종속’됐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2006~2010년까지 5년간 우리나라가 해외에서 수입한 무기 규모를 봐도 미국 편중 실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이 기간 중 미국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구매했으며, 다음으로 독일과 이스라엘, 영국, 터키 순으로 집계됐다.
미국은 정부가 보증하는 구매 방식인 FMS(대외군사판매제도)를 포함해 66%를 차지했다.
2010년 한 해만 미국에서 9822억원어치의 무기를 도입했으며, 이스라엘 660억원, 영국 584억원, 독일 472억원, 프랑스 126억원, 네덜란드 64억원, 러시아 48억원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근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사일을 비롯한 전략무기 거래선을 다원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군 관계자는 “한미 동맹을 유지하고 양국 간 무기 체계의 ‘상호 운용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략 무기의 다원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미 미사일 지침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과 중·장거리 미사일 능력을 보유하지 않고 있을 때인 33년 전에 만들어졌다.
중국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시작하기 전에 사거리 180㎞로 제한된 지침이 맺어졌다.
하지만, 중국·일본·북한은 지난 30년간 사실상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능력을 보유할 정도가 됐다. 우리가 자위(自衛) 목적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1000㎞ 이상 늘린다고 해도 긴장이 더 고조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에만 비확산 논리를 적용해서 미사일 지침을 유지하려 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것이 국방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지적이다. 한국의 개발능력을 계속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북한의 오판(誤判)을 부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한국에 적용되는 미사일 비확산 논리가 더 이상 한국 국민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