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학봉 도쿄 특파원

"현재 일본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은 일청(日淸)·일로(日露)전쟁 전야(前夜)와 매우 유사하다."

일본의 유명 경제학자인 와타나베 도시오(渡邊利夫)는 '신탈아론(新脫亞論)'이라는 책에서 일본의 안보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중국의 미사일이 일본을 겨누고 있으며, 한국은 독도 실효 지배를 통해 일본에 모욕을 가하고 있다는 논리이다. 일본에서 최근 집단적 자위권 도입과 군비확충 등의 논의가 구체화되는 것도 와타나베식 사고가 확산된 탓이다.

그는 일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처럼 동아시아에서 탈피, 미국 등 해양 세력과의 동맹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일본 근대사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1885년 '탈아론'을 통해 '나쁜 친구(惡友)'인 중국·조선과의 관계를 끊고 아시아를 벗어나자고 역설했다. 실제로 일본은 청·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으며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은 19세기 말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의 이웃은 과거의 허약한 나라들도 아니다. 중국은 미국과 힘을 겨루는 G2로 급부상했으며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은 식민지배와 전쟁의 폐허 위에 일어서서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 됐다. 또 지금은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던 제국주의 시대도 아니다. 일본은 이웃 나라보다 한발 앞선 개혁·개방을 통해 주변국을 압도했던 과거의 '부국강병(富國强兵)' 국가도 아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감소, 퍼주기식 토목공사와 복지정책으로 인한 200%가 넘는 국가 부채, 총리가 1년에 한 번씩 바뀌는 리더십 결핍, 경기의 장기 침체와 일본 대표기업의 적자 행진….

일본의 진정한 위기는 내부에 있다.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지만, 늘어나는 국가 부채로 일본의 군비는 10년째 감소 중이다. GDP 세계 2위의 자리를 중국에 내준 것도 일본 경제가 뒷걸음질친 것이 원인이었다. 인구 감소로 국가 존폐론까지 나오는 것은 폐쇄적 이민정책 탓이다. 일본이 이 정도의 경제력을 유지하는 것도 어쩌면 한국과 중국 덕분이다.

일본에서 이웃 나라 위협론이 급부상하는 것은 내부의 위기를 외부로 돌려 돌파구를 찾으려는 의도가 강하다. 거기다가 중국이 센카쿠 등 해양영토 분쟁에서 보이는 위압적 모습이 위기론에 불을 지폈다. 한 일본 언론인은 "중국의 힘 과시와 해양 진출이 세계대전을 향해 치닫던 1930년대 일본의 폭주(暴走)를 연상시키면서 불안감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은 급성장하는데 일본의 국력이 위축되고 있다는 초조함과 불안이 '강한 일본'을 외치며 핵무장을 주장하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시장과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지지율을 높이는 배경이다.

일본 정치인들은 연말로 예상되는 선거가 다가올수록 더욱 강경한 발언에 유혹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시대착오적 주장을 하는 정치세력에 휘둘려 이웃 나라를 자극하는 것은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을 유발할 뿐이다. 이웃 국가의 협조 없이는 일본이 외교력을 발휘할 수 없고 안보 주도권도 쥘 수 없다. 일본은 근거 없는 나쁜 친구 탓하기를 멈추고 스스로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