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걸고 한 여자 태희만을 사랑하겠다던 남자 인우는 17년 만에 다시 그녀를 만난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태희는 열일곱 남학생 현빈으로 환생해 인우 앞에 나타났다. 현빈은 '태희처럼' 물건을 잡을 때 새끼손가락을 펴고, '태희처럼' 젓가락·숟가락의 시옷·디귿 받침이 붙은 이유를 묻는다. 운명에 포박당한 인우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사랑 속으로 뛰어든다.

올여름 유일한 대형 창작뮤지컬인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야기 사이사이 감정을 쌓아올릴 줄 아는 섬세한 세공 솜씨가 돋보인다. 배우 이병헌과 고(故) 이은주 주연의 동명 영화(2001)를 연극적인 언어로 세밀하고 촘촘하게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17년 시공(時空)을 넘나들며 현재의 인우와 과거의 인우가 자연스럽게 오가는 장면들은 두 장의 파스텔화를 겹쳐 보여주듯 곱고 부드럽게 이어진다.

올여름 유일한 대형 창작뮤지컬인‘번지점프를 하다’는 주인공 인우(왼쪽)와 태희의 사랑을 서정적인 음악에 실었다.

인우가 처음 등장해 칠판에 긋는 흰 선(線), 수억만 분의 일 확률로 두 사람이 만나는 선을 무대 전면에서부터 객석으로 연장해 관객과 극장을 인연의 끈으로 둘러싸듯 표현한 아이디어가 좋았다. 2008년 워크숍 때부터 다듬어온 음악은 운명적인 사랑의 두근거림을 아련하게 살렸다. 2009년 시범 공연 때부터 공을 들였다는 배우 강필석은 인우의 '미친 사랑'을 사소한 표정에까지 잘 담았다. 전미도는 보슬비에 젖은 해바라기 같은 태희에 적역이다. 남성적인 매력의 김우형은 인우의 심적 고통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은 대극장이라는 거대한 캔버스를 만나면서 상당 부분 빛이 바랬다. 연출의 붓질이 아무리 세심하게 무대를 채우려 해도 프로덕션의 크기에 걸맞지 않은 대형 무대가 애써 그린 회화를 질식할 듯 짓누른다.

영화를 옮긴 연극이나 뮤지컬은 관객이 집에서 DVD를 보는 대신 일부러 극장을 찾아야 할 이유를 보여줘야 한다. 관건은 무대를 보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뮤지컬 '서편제'의 미닫이문에서 고운 한지를 떼어내고 시커멓게 칠해 옮겨놓은 것처럼 보이는 '번지점프'의 무대는 인우와 태희의 사랑을 음습하고 우울한 틀에 가둬버렸다. 채도 높은 회색 유화 물감을 두텁게 발라놓은 듯한 색감은 물빛 수채화를 기대한 관객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제작사 뮤지컬해븐은 역시 대극장에 올렸던 전작 '파리의 연인'의 흥행 참패라는 강펀치를 맞고 다시 링에 올랐다. 창작뮤지컬에 대한 해븐의 의욕이 날개를 펴려면 무대 공간에 대한 미학적인 고민이 조금 더 필요해 보인다.

▲9월 2일까지,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 (02)744-4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