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중앙은행의 명목금리가 제로 이자율에 이미 도달한 미국일본을 제외한 세계 주요 국가들이 금리 인하에 나서고 있다.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중앙은행은 금리를 1%에서 0.75%로 낮췄고 브라질·중국·인도·호주 등도 경쟁적으로 금리를 인하했다. 최근 한국은행도 오랜 금리 동결을 깨고 전격적으로 금리를 인하했다.

세계 각국의 금리 인하는 언뜻 실물 경기 부양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 국가가 금리 인하를 통해 직접 경기 부양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정책 금리 여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경기 부양 가능성 자체보다는 심각해지고 있는 글로벌 디플레이션 대비가 중요한 배경으로 지적된다. 특히 한 국가의 디플레이션 위험은 국제무역과 국제금융시장을 통해 인접 국가로 전이되기 때문에 글로벌 금리 인하를 초래하고 있는 세계적 디플레이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디플레이션에 따른 해외 제품의 가격 하락은 국제무역을 통해 국내 물가에 영향을 미쳐 수출·수입제품 가격을 낮추는 압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와 같이 국제금융시장의 통합도가 높은 경우에 미국·유럽·중국 등 세계경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의 자산 가격 하락은 우리에게도 비슷한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낮은 물가 상승 또는 지속적인 물가 하락을 의미하는 디플레이션은 높은 물가 상승인 인플레이션보다 훨씬 더 무서운 대상이다. 제품 가격의 하락이 두려운 것은 투자가 미래 가격 예측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투자를 위해 자금을 조달하는 입장에서 앞으로 생산된 물건값이 내려갈 것으로 보이면 투자한 공장이나 건물 가격 역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투자를 위한 자금 조달이 어렵게 된다. 결국 디플레이션은 대부분 투자 감소와 자산 가치 하락을 수반한다.

이는 또한 투자의 상당 부분은 타인 자금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흔히 이러한 상황을 "디플레이션으로 채무의 실질 가치가 증가한다"고 표현한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1억원을 빚내 2억원짜리 집을 샀는데 집값이 1억5000만원이 되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투자나 소비를 할 수 없고, 심한 경우는 파산하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의 집값도 함께 떨어지게 된다.

미국 경제학자 어빙 피셔가 '채무 디플레이션'이라고 명명한 이 경로는 대공황을 연구한 많은 학자가 당시 세계경제가 악화된 주요 배경 중 하나로 생각한다. 1933년 미국 정부는 이 경로를 끊기 위해 채무자의 상환 부담을 경감하는 획기적 조처를 취했다. 물론 기존 채무 계약을 뒤엎는 것이었기에 소송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미국 대법원은 이 조처가 합헌(合憲)이라고 1935년 판결했다. 디플레이션으로 어려움에 빠진 채무자들의 부채 상환 부담을 덜어줘 긍정적 효과를 가졌던 경우이다. 미국 시카고대학 크로즈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기존 계약을 일부 무력화함으로써 채무자 부담을 줄이는 조처가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오히려 채권과 주식 가격이 상승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미국 경제가 대공황에서 살아난 것은 아니지만 채무자의 부담을 줄임으로써 채무 디플레이션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세계적인 디플레이션 확산 속에서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고령화 때문에 부동산 중심으로 이미 구조적인 자산 가격 하락 압력이 현실화하는 가운데 글로벌 디플레이션에 추가적으로 노출되는 상황은 우리 경제에 큰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가계 대출 및 부동산 담보대출 등으로 심각한 채무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경제 주체들에 대해 거시적 금리 인하뿐 아니라 자산 가치 하락에 따른 재무적 곤경 상태를 해소할 수 있는 개별적인 채무 재조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당장 채무 재조정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예로는 집값 하락으로 주택가격대비담보인정비율(LTV)이 늘어나 어려움에 처한 가계에 대한 만기 연장과 이자율 전환 문제 등이 있다. 또 저소득 계층에 대해서는 주거 관련 금융 비용을 줄이기 위한 공적 보증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받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나을 수 있을까?'라는 크로즈너 교수의 논문에서 지적된 것처럼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채무자의 상환 부담을 완화하려는 노력은 채무자뿐 아니라 채권자를 포함한 경제 전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채무자의 상환 부담을 완화하는 노력이 새로운 채무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자 부담이 과중한 대출을 낮은 이자율로 갈아타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신규 대출 확대로 전반적인 거품을 만들어 부동산 가격을 띄우려는 시도는 자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