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은 조선일보 특집면에 신간 한 권을 소개하면서 "한번 보고 다시 보고시픈 자미잇는 이야기뿐" "조선 정취를 담뿍 실은 책자" "읽을만한 자미잇는 서적이 드문 우리 조선에서… 반드시 한번 읽어야 할 호저(好著)"라며 "서슴지 안코 권하고 시프다"고 했다(1938년 11월 4일자). 야담가 신정언(申鼎言)의 '야담집(野談集)'에 쏟아 부은 찬사였다.
조선에 '야담'이 등장한 것은 10년쯤 전인 1927년 11월 13일. 그날 밤, '청강료' 50전을 낸 수백명이 경성 천도교 기념관을 메웠다. 조선의 선각자 김옥균이 육혈포에 쓰러지기까지의 과정을 '김옥균씨의 최후'란 강제(講題) 아래, 김진구(金振九)가 조선 최초로 연 강담회를 찾은 인파였다(1927년 11월 12·15일자).
일본에선 명치(明治)시대 이래 군중을 모아놓고 입심 좋은 강사가 '강담(講談·전쟁 무용담 같은 이야기)' 혹은 '낙어(落語·우스운 이야기)'란 이름으로 대중에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대회가 인기를 끌었다. 조선에서도 이를 처음 선보인 것.
며칠 뒤, 김진구를 중심으로 '조선야담사'가 창립됐고(1927년 11월 25일자), 최남선(崔南善) 방정환(方定煥) 차상찬(車相瓚) 등이 고문으로 참여하면서 '일대 활약'을 다짐했다(12월 7일자).
조선의 '력사�T 민중교화 긔관'으로 자임한 야담사는(1928년 12월 7일자) 민중 교육의 일환으로 전국 순회 야담대회를 개최했고(1928년 12월 9~16일자), 역사 속에서 소재를 구한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는 가는 곳마다 청중을 사로잡았다. 1933년 2월 인천서 열린 '윤백남(尹白南) 야담대회'에는 무려 1만여명의 청중이 몰릴 정도였다(2월 7일자).
1933년 경성방송국이 조선어 방송을 독립시킨 후엔 '연속 야담'을 단골 프로로 편성했고, 1935년 11월 동양극장에서 열린 '야담대회'를 '캐취하야' 전국에 중계 방송하는 등(11월 30일, 12월 6일자), 야담은 방송을 타면서 "절대의 인끼를 독점"했다(1939년 4월 1일자).
"혀크떼 전광석화(電光石火) 쏘다지는 기변재담(奇辯才談)"이었던(1936년 2월 6일자) 야담은, 신정언 윤백남 유추강(庾秋岡) 등 스타 야담가의 '신묘한 화술'을 통해, "듯는 사람을 웃기고 울리며, 오묘한 신비의 세계와 아슬아슬한 선율의 궁지로 끌고 들어가" 지친 백성의 '정신을 황홀케' 만들었다(1939년 4월 1일자).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야담'은 광복 후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라디오와 잡지 등의 인기 아이템이었으나, TV시대가 열리면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