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근사한 은빛을 띤 모형 헬리콥터가 문제였다. 아빠 생신 선물로 마련해 드린 작고 귀여운 헬기는 장난감 수준을 넘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실 위를 날렵하게 돌았다. 녀석은 덩치가 커다란 소년들도, 넥타이를 맨 성인 남자들도 무선으로 조종하며 일종의 스포츠처럼 즐기는 모형 헬기였다. 평소 아빠께서 흥미로워하셔서 하나쯤 사드려 볼까 하는 작은 정성이었는데, RC(radio control) 헬기는 생각보다 마니아들이 많았고 규모가 꽤 큰 동호회도 구축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아빠의 RC 헬기 사랑이 시작됐다. 5만원짜리로는 양에 차지 않으셨는지 몇십만원을 호가하는 것을 사 오시고, 연습하다 부러진 날개 대신 새로운 부품들로 교체하면서 틈틈이 무선 조종을 즐기시더니 급기야 진짜 헬기를 몰아 보시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익스트림 스포츠는 뭐든지 위험천만한 취미라서 절대 안 된다고 만류하시자 아빠는 못내 섭섭해하시는 눈치였다.
입맛만 다시며 물러날 것 같았던 아빠를 다시 비행기로 유혹한 건 뜻밖에도 엄마였다. 어느 날 두 분이 서해안 드라이브를 다녀오시던 길에 내비게이션 화면에 안내된 경비행기장을 잠시 둘러보던 중 엄마가 "그깟 장난감보다야 경비행기를 직접 타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라며 아빠 등을 떠밀었단다. 두 분이 결혼 전 데이트하실 때는 바이킹이나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조차 어지럽다고 피하며 절대 안 타던 아빠와 달리 엄마는 스릴 넘치는 기구를 두루 섭렵하며 마냥 즐거워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은 오히려 아빠가 경비행기 탑승 체험을 즐거워하셨고 정작 엄마는 무섭다고 구경만 하셨단다. 그렇게 물꼬를 튼 아빠의 첫 비행 체험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줄은 아빠도 엄마도, 나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직장에서 퇴근하시면 엄마와 정답게 운동도 하고 나에게도 살가운 시간을 나눠주시던 아빠는 이제 컴퓨터로 비행 시뮬레이션을 하느라 식사도 대충 하시기 일쑤였다. 취미 삼아 다루던 악기들도 먼지가 뽀얗게 앉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됐다. 좀 과장한다면 아빠의 초점은 온통 창공에 맞춰져 있었고 헬기나 경비행기가 초(超)관심사가 돼 버렸다. 조종에 관한 책이며 비행 시뮬레이션 CD 등을 주문하고 꾸준하게 자료를 모으시는 아빠를 지켜보던 엄마가 나에게 슬그머니 농담 삼아 한탄을 하셨다.
"에고, 딸아. 네가 괜한 걸 선물이라고 해 드려서 니 아빠 병나신 것 같다. 아니지. 내가 치사하게 장난감 헬기 가지고 놀지 말고 통 크게 진짜 비행기를 조종해보라고 바람 잡은 게 탈이 난 거라니까. 딸아, 네가 책임질래, 내가 책임질까. 으으~." 하지만 나는 노코멘트였다. 어차피 아빠의 고집도, 엄마의 지청구도 내가 나서서 교통 정리될 사안이 아니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유난히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엄마가 아빠의 눈빛을 응시하며 이렇게 힘줘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왕 시작하신 거, 주저하지 말고 계속 하시라"고. 아빠가 나지막이 건네시는 말씀 또한 반전이었다. "비행 교습비가 생각보다 훨씬 더 비싼 것 같아서…. 취미 비용치고는 무리인 것 같아 망설이기도 했는데…. 이참에 우리 함께 해 보자고. 그래야 나도 더 신나서 할 게 아닌가. 흐흐흐~."
헐~ (오 마이 갓) 눈치 없으신 울 아빠, 평소 뭐든지 엄마랑 함께 하는 걸 좋아하시지만 이번엔 좀 욕심이 과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지조 있고 심지 굳은 엄마가 여장부 특유의 뱃심을 보여주신 결과 아빠 혼자서 신나게 비행하시는 걸로 결론이 났다.
지금도 아빠의 비행 실습은 계획대로 잘 유지되고 있고 담당 교관으로부터 "감각이 빠르고 진행 속도가 유연하다"는 칭찬을 받고 계시는 중이란다. 어떻게 아빠의 '비행'을 후원하시게 된 거냐고 여쭤봤더니 엄마는 나를 보고 웃으시더니 나중에 아빠께 꼭 이렇게 말씀하시겠다고 했다.
'당신, 충분히 자격 있어요. 이십여년 넘게 처자식을 위해 고생 많았잖아요. 생전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올곧게 가족만을 위해 애썼는데 뭐, 그만한 투자 한 번 못 하려고요. 다린 아빠는 충분히 잘해낼 거라고 믿어요.'
아빠는 올해 쉰일곱이시다. 지금은 현역으로 계시지만 언젠가 은퇴 후에 또 다른 삶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익숙하고 재미난 일을 찾아 취미 삼아 할 거라고 하신다. 엄마와 나도 물론 아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의 역할을 잘 해내겠지만 당신 스스로 즐겨 하시는 악기 연주든, 외국어 회화든, 캡틴 흉내만 내는 저공비행이든 최선을 다할 거라는 다짐이다. 빛나는 가장이신 아빠,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당신의 의미 있는 새로운 도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