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택(89)씨는 25일 "내가 배운 게 없어서 (소송에) 이긴 것만 알지, 뭘 어떻게 이겼는지는 모르겠다"며 "아직 실제 배상을 받은 게 아니지 않으냐.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는 눈을 못 감겠다"고 말했다. 그는 24일 대법원에서 일본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승소취지 판결을 받아낸 징용피해자 9명(5명은 이미 사망)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43년 신천수(86)씨와 함께 '오사카 제철소에서 2년간 훈련을 시킨 후 한반도 제철소에 기술자로 취업시켜 주겠다'는 일본제철의 광고를 보고 오사카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오사카에서 그를 기다린 건 노예생활이었다고 여씨는 말했다. 일본 순사들이 느닷없이 '징용장'을 내밀었다. 취업은 강제노역으로 바뀌었다.
"용광로 앞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나면 몸이 다 녹는 것 같았지. 그런데도 주먹밥 하나로 하루를 버텨야 했어."(신천수씨)
일본인들에게 '정신봉(몽둥이)'으로 맞아가며 매일 10시간 넘는 중노동에 시달린 그들에게 일본제철이 쥐여주는 건 담배 두 갑뿐이었다고 한다. 신씨는 일본 순사들이 수시로 일을 잘하는지 감시했고, '도망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매타작을 당했다고 말했다. 신씨는 6·25 때 군에 자원해 최전방에서 싸웠고 묘향산까지 올라갔다 중공군에게 포위돼 죽을 고비도 넘겼다. 이후 미군부대 식당 종업원으로 시작해 서울에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두 사람과 함께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낸 이춘식(88)씨는 1941년 대전에서 다른 청년 80여명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홋카이도에 있는 제철소에서 석탄을 용광로에 퍼넣는 일을 했다. 징용기간 중 잠시 귀국했는데, 이내 일본군에 징집돼 고베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는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대법원 판결을 듣고 엉엉 울었다"고 했다.
김규수(83)씨는 열네 살이던 1943년 일본제철로 끌려갔다. 도망가다 발각돼 5일 동안 흠씬 매를 맞았다고 한다. 6·25 참전 유공자인 그는 한 참전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내게 된 계기는 여씨가 자신이 징용에 끌려가 일한 대가로 나온 임금이 오사카 공탁소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1945년 광복 당시로 치면 소 10마리 값인 460엔가량이 미지불 임금 형태로 공탁돼 있었다는 것이다. 여씨는 신씨 등 당시 일본제철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끌어모았다.
일본에서 먼저 시작한 소송은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 격)의 "배상 시효가 지났다"는 패소판결로 벽에 부닥쳤다. 여씨 등은 너무 분해서 팔십이 넘은 나이도 잊고 일본 재판정에서 소란을 피우고, 이를 막는 경위들과 몸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신일본제철에 항의하러도 찾아갔지만, 신일본제철은 '한번 만나만 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고 여씨는 말했다.
한국 법원의 1·2심에서도 일본 법원 판결과 다름없이 패소하면서, 자포자기 단계까지 갈 뻔했다고 이들은 말했다.
여씨 등의 소송전은 일본 기업들의 한국 내 재산을 찾아내 실질적인 배상금을 손에 쥐는 것이 지상목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고령인 이들이 생전에 배상을 받기 위해선 시간과도 싸움을 벌여야 한다.
여씨 등이 신일본제철을 향해 소송을 벌이는 동안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낸 박창환씨 등 5명은 모두 숨졌다. 소송은 이들의 유족들이 대행하고 있다. 박씨의 아들 재훈(66)씨는 "소송 전까지 아버지의 일본생활에 대해 거의 들은 게 없다. 아버지는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피폭되기도 했다는데 피폭자들은 혹시 자식들이 불이익을 받을까 싶어 그런 얘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쓰비시 소송을 맡은 최봉태 변호사는 "피해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며 "남은 법적 절차를 하루빨리 진행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