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외국인 관광객과 수학여행을 온 지방학생 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궁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월요일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하루 세 차례씩 벌어지는 풍경. 비슷한 시각 1㎞ 남짓 떨어진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도 똑같은 '왕궁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고 있었다. 두 곳 모두 조선시대 왕궁의 수문장 교대의식을 재현한 것이다. 그런데, 복식이나 교대 방식이 서로 달랐다. 대한문 수문장은 사극 등에서 우리 눈에 익숙한 '구군복(具軍服)' 차림인 반면, 광화문 수문장은 허리에 띠를 두르지 않은 '철릭(저고리와 치마가 연결된 모양의 군복)' 차림이었다. 대한문은 한 명 한 명 맞교대하는 '면대면' 교대인 반면, 광화문은 부대와 부대가 열을 지어 들어가고 나가는 식으로 임무를 맞바꿨다.

누가 맞는 것일까. 조선시대에 실제로 이런 교대의식이 있기는 했을까. 전문가들에게 문의한 결과, "조선시대 수문장 교대의식에 대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때문에 한때 교대의식은 "상상에만 의존해 영국 바티칸 등 유럽 왕실 근위병 교대식을 흉내 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996년 처음 교대의식 행사가 시작된 이래 조금씩 원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수문장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단편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중에는 '표신이 없다 하여 별감이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수문장을 추국하게 하다'(성종 25년) '수문장에게 명하여 착모를 금한자는 출입하지 못하게 하다'(영조 48년) 등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연산군과 광해군 때는 궁문 밖에 잡인들이 들끓었는지 수문장이 이들을 쫓아내지 못해 벌을 받은 기록도 있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 등은 수문장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형태로든 교대식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광화문과 대한문 교대식은 모델로 삼은 시대가 다르다. 서울시의 위탁을 받아 대한문 교대식을 주관하는 '한국의 장(場)' 안희재 대표는 "조선시대 문화가 가장 화려했던 영·정조 시대를 복원한 것"이라고 했다. 반면 광화문 교대식은 '궁성의 문마다 수문장을 세우고, 수문장패를 만들게 하다'라는 기록이 처음 나오는 조선 초 예종시대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위탁으로 광화문 교대식을 주관하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2002년과 2010년 두 차례 연구보고서를 냈다. 경국대전 등 여러 문헌에서 암호를 받는 법, 문 개폐 시각 등에 대한 기록을 찾아 집대성했다. 김현성 감독은 "당시 부대가 광화문 동쪽에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우리도 사무실을 광화문 동쪽에 마련하는 등 가능한 한 당시 모습을 살리려 노력했다"며 "고증에 상상을 가미해 계속 복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문장 교대식 아이디어는 16년 전 한 서울시청 공무원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가 바로 이번 19대 총선 새누리당 후보로 나서 노원구에서 '나꼼수' 김용민씨를 꺾고 당선된 이노근 당선자다. 당시 서울시 문화과장이었던 이 당선자는 '우리도 영국처럼 왕궁에서 수문장 교대의식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에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서울시 내부에서도 고증 부실에 따른 비판이 우려돼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소관 부서를 관광과로 넘겨, 외국인 관광객용 이벤트로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이 당선자는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지만, 세월이 흘러 고증자료가 하나 둘 쌓이면서 역사적 의미도 갖게 됐고, 연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서울의 명물로 자리 잡지 않았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