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0월 31일 미국 존슨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함께한 연회에 쓰인 족자형 메뉴판엔 편육, 구절판, 전유어 같은 서빙 음식 외에 참석자들이 기념으로 손수 쓴 이름이 적혀 있다. 1896년 5월 23일 러시아 니콜라이 2세 즉위식 만찬회 메뉴판은 모스크바 시가지를 배경으로 화려한 금박 의상을 입고 백마를 탄 늠름한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런 역사적 메뉴판을 모은 이는 백성현(62) 명지전문대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교수. 그가 22년간 수집한 메뉴판은 요리사 모자를 쓴 아기천사가 어깨에 커다란 스푼을 메고 있는 스위스 컨티넨털호텔의 1898년 크리스마스 메뉴, 1919년 화재로 소실된 도쿄 임페리얼호텔의 식당 메뉴(1905년) 등 120개국의 3000여점에 달한다. 백 교수는 이 중 36점을 1~12일 대전에서 열리는 세계조리사대회(준비위원장 염홍철)에 전시할 예정이다.
그가 메뉴판에 '꽂힌' 때는 LG상사 파리 지사장으로 근무하던 1980년 초였다. 업무상 손님을 모시고 파리 유명 레스토랑에서 식사 대접할 일이 많았는데, 음식보다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아름답고 특색 있는 메뉴판에 반해 버렸다.
"종업원에게 기념으로 하나 달라고 했더니 리본으로 예쁘게 묶어주기까지 하더군요. 레스토랑마다 메뉴판이 다르니 수집하면 의미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물건일수록 수집품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그의 신념도 작용했다. 고서점을 찾아 파리 골목골목을 걸어 다니고 박물관을 집 드나들 듯하며 정보와 물건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누가 희귀한 걸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당사자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당신 열정에 두 손 들었다"며 박물관 소장품을 양도해준 프랑스인 사서도 있었다.
그의 수집품 중엔 샤갈이 그림을 그린 메뉴판(1964년 프랑스 유명 갤러리 오픈 만찬회용)을 비롯해 장 콕토, 알폰소 무하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손수 만든 메뉴판도 있다. 냉전시대 구소련에서 처음 문을 연 맥도널드 메뉴판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도 있다. 뉴욕공립도서관(NYPL)에 '세계 최고(最古)'라고 전시된 것(1851년)보다 앞선 1843년 메뉴판(벨기에)까지 갖고 있다.
백 교수가 메뉴판 수집에 열정을 쏟는 이유 중 하나는 니콜라스 2세 즉위식 만찬회 메뉴처럼 오직 그날을 위해 만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제작품이 많아서다. 메뉴판은 또 당시 식문화 등 여러 가지를 말해준다. 중앙에 관이 비스듬하게 새겨진 1912년 프랑스 시골 마을의 한 장례식 메뉴판을 보면 고기나 생선을 주로 한 메인 요리 없이 이례적으로 전채로만 소박하게 구성돼 있다. 색깔이 화려한 과일 디저트도 가족에게만 제공됐다.
"17~18세기엔 영국·러시아 메뉴판도 프랑스어로 적는 경우가 많았어요. 음식 이름에 프랑스어가 많기도 하지만 문화 선진국 프랑스를 추종한 거죠. 어떤 유럽 메뉴판엔 가격표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가 있어요. 가격표가 있는 건 접대자용입니다. 초대받는 사람은 가격 따윈 신경 쓰지 말라는 거죠. 멋스럽지 않습니까?"
백 교수는 열혈 수집가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고대 로마 저금통까지 갖고 있는 그는 세계저금통수집가협회 아시아인 최초 회원이며, 세계박람회 수집품도 3000여점 모았다. 구한말 한국을 그린 일러스트레이션, 앤티크 로봇을 모으기도 했다.
"저는 수집하다가 교수까지 됐어요. LG상사에서 근무할 때 '파리 지사장은 문화 문외한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예술 공부를 했고, 외국인들이 그린 한국 이미지를 모으기 시작했죠. 그랬더니 소르본대학 디자인 교수가 '당신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하더군요." '나이도 많은데 무슨 공부…' 싶어 계속 갈등하다 결국 예술사박사 학위를 땄다.
수집가인 그는 수집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수집가는 다양한 음표를 가져다 거기에 강약을 넣어 곡을 쓰는 작곡가와 같아요. 돈 많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물건을 통해 스토리와 의미를 구현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