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허설을 하는 피아니스트 이경미씨.

"리허설할 땐 안 그랬는데, 곡 시작하고 10분쯤 됐을 때 마, 소리에 잠깐 피곤한 느낌이 나타났어요. 그러다가 다시 후반부 가서는 괜찮아지대."

"아, 네 맞아요. 아셨구나. 그때 맨 앞 자리 꼬마 애가 무대 앞을 왔다갔다하는 데 신경이 좀 쓰였어요."

"그래도 역시 모차르트는 이갱(경)미야, 이갱미."

재산 2조원, 연 매출 2조5천억엔의 마루한그룹으로 일본의 17번째 부자(포브스지 집계)로 꼽히는 한창우(81) 회장. 그러나 이날 이 순간만큼은 재벌회장이 아니라 60년 클래식 마니아이고 싶어 했다.

꽃과 비가 함께 내리던 지난 22일, 교토(京都)콘서트홀에서 로터리클럽 창립 150주년 음악회가 열렸다. 일본과 한국, 대만 3국 로터리클럽 회원을 위한 공연을 위해 교토필하모닉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선택한 협연자는 피아니스트 이경미(50·경남대 교수)씨. 이씨는 이날 모차르트 협주곡 20번을 골랐다. 모차르트 작품으로는 드문 단조곡으로 인간사 희로애락이 느껴지는 진행이 특징. "이경미의 연주는 남성적도, 여성적도 아닌 중성적인 느낌"이라는 한창우 회장은 "오늘은 선곡도 일품이었다"고 추임새를 넣었다.

◇'힘내라 이경미' 연주회

짐짓 '마니아 관객'인 척하고 있지만, 한창우 회장은 사실 이날 행사의 교묘한 연출자였다. "벚꽃 좋을 때 교토에서 연주하면 안 좋겠나. 청수사(淸水寺)도 보고. 꼭 한번 오소."

1년 전, 한창우 회장은 이경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교토에서 파친코 기업을 일으켜 전국구 재벌이 된 그는 지금도 교토에 살며 교토로터리클럽 회장, 교토필하모닉 이사를 맡고 있다. 교토권역 최초의 클래식음악다방 루체, 클래식이 흐르는 레스토랑을 만들었던 그에게 교토는 고향 경남 삼천포와 매한가지다.

이경미는 그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암 투병 3년째인 이경미가 처지지 않도록 무대에 세우고 싶은 것이었다. 유방암 수술을 했을 때도, 한 회장은 "이경미는 피아노가 있으니까 반드시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고 했고, 바쁜 와중에도 "밥은 먹었나" "약은 먹었나" 수시로 전화를 해댔다. 도쿄 외에 '지방'에서는 공연해 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그래서 이번 무대에는 서기로 했다.

연주회가 끝난 후 교토콘서트홀 로비에 선 피아니스트 이경미와 한창우 마루한회장.“ 열여섯 살에 세상을 떴지만, 아직도 매일 매일 생각이 난다”는 한 회장의 장남 철이씨와 이경미씨는 동갑이다.

◇연주 듣고 눈물이 났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이경미씨는 아오야마 대학에 교환교수로 머물며 국제정치를 공부하고 있었다. 대학으로 한 회장이 찾아왔다. 앞서도 몇 번 제안이 있었지만, "야쿠자인 줄 알고" 거절하던 차였다.

"왜 저를 만나려고 하느냐" 물었다. "아는 사람이 음반을 줘서 들어 봤더니 눈물이 나더라. 왜 났는지 모르겠지만 가슴을 자꾸 아리게 해 눈물이 나더라. 여성이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두고 일본에서도 음반으로 이렇게 크게 이름을 알렸다니. 게다가 국제정치학까지 공부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장한 일이냐. 필요에 의해 귀화했지만, 난 영원히 한국 사람이다. 한일 관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일본에서 성공해야 하고 그러려면 서로 도와야 한다.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라." 자존심 강한 이경미가 손 벌린 적이 없어, 그는 자꾸만 뭔가 해주고 싶어한다. 이경미씨가 지난해 산토리홀에서 한국 피아니스트 최초로 초청받아 독주회를 가졌을 때도, 한 회장의 온 가족이 와서 응원해줬다. "나무같은 친구" 그것이면 족하다는 게 이경미 생각이다.

◇'파친코 왕', 음악이 만들었다

어머니가 싸준 쌀 두 되, 영일사전을 가방에 넣고 소년 창우가 일본 가는 밀항선을 탄 것은 1947년. 배도 고팠고, '좌파' 청년으로 몰려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일본에 도착, 닥치는 대로 일하고 끼니는 양배추와 된장으로 때웠다. 그러다 결핵에 걸렸다. 6개월 입원하다가 그는 새 세상을 봤다. 온종일 라디오를 들었는데, 팝송이고 엔카고 다 싫고 클래식만 좋았다. 조금만 들어도 연주자를 알아맞힐 정도가 됐다. 클래식을 알고 나니 미술과 패션에도 관심이 생겼다. 프랑스에 가서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매형에게 돈을 빌리러 갔지만, 작은 파친코를 하는 매형 신세도 말이 아니었다. 한창우는 돈 벌어 유학을 갈 요량으로 파친코 잡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가로 첫 '대박'이 난 건, 클래식 덕이었다. 1957년 교토 북쪽의 소도시 미네야마에 그는 최초의 클래식다방을 열었다. 섬유산업으로 돈이 많은 동네, 그러나 지적으로는 허기졌던 동네에 연 클래식 다방은 대 히트였다. 퀴퀴하고 무서운 남자들만 모여 있는 파친코장을 세련된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서빙하는 분위기로 만든 것도 그의 '고급 취향'에 힘입었다.

음악ㆍ패션에 관심이 많은 '몽상가'가 어떻게 그렇게 큰 부자가 됐을까. "돈을 버는 데는 절대적으로 인간미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기업의 윤리성도 결국 인간미 문제다. 음악은 인간미에 도움이 되니까, 결국 좋은 기업이 되도록 한다." 쉽게 물었다. "그럼 음악을 알면 돈을 잘 버는가." 그가 화통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런 건 드물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이 돼야지."

그에게 또 물었다. "왜 이경미 외에도 수십년간 여러 음악가를 후원했고, 왜 전 재산을 한국과 일본에 기부하겠다고 했나." "예술가가 돈을 알면 음악이 안 나와. 그리고 기업가가 할 게 뭐 있어. 정치는 할 수 없고, 그것밖에 할 게 없는기라." 30년 연상 친구를 이경미는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