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지난해 방위사업청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저질 건빵과 햄버거 등을 부대에 납품했던 군납비리 사건이 터졌었다. 당시 방사청은 국민에게 사과하고 해당 업체들에 대해선 입찰금지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불과 수개월 뒤 실시한 올해 입찰에서 문제의 업체들이 무더기로 낙찰 1순위에 올라 최종 계약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비리 군납업체들 줄줄이 다시 낙찰

지난 3일 방사청은 증식용 건빵 납품업체 선정을 위한 입찰을 실시했다. 육해공군 병력 상황 등을 고려해 4개 지역으로 나눠 공급업체를 뽑았는데 4곳 모두 낙찰 1순위는 D종합식품이었다. D종합식품은 서류검토와 이행능력 심사를 통과하면 바로 최종 낙찰자가 된다. 이 업체는 1봉당 353원씩 모두 1175만봉 41억여원어치의 건빵을 1년간 전국 부대에 납품할 예정이다. 이 회사는 2011년 입찰에서도 3개 지역 건빵 사업자로 선정됐는데, 올해는 모든 지역을 '독식'했다. 그러나 D식품은 지난해 경찰 수사에서 쌀가루보다 밀가루를 많이 넣은 저질 건빵을 공급하고 방사청 직원에게 제품 원가를 높여달라는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의 뇌물을 제공한 혐의가 드러난 업체다.

건빵 입찰 하루 뒤에 실시한 골뱅이통조림 입찰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4개 권역으로 나눠 실시한 입찰에서 1·2지역은 S종합식품, 3·4지역은 S사가 1순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S사는 지난번 수사에서 방사청 공무원에게 뇌물을 줬다가 적발돼 6개월간 입찰금지 조치를 받은 업체였고, S종합식품은 무허가 냉장·냉동 시설에서 제품을 만들다 지방자치단체로부터 행정처분을 받은 업체였다. 업계 관계자는 "두 회사가 4개 지역에서 사이좋게 1·2위를 나눠가졌고 낙찰률도 다른 식품보다 높아 담합한 의혹까지 있다"고 했다. S종합식품과 S사는 지난 19일 최종 낙찰자로 선정돼 각각 14억원어치의 골뱅이를 군부대에 납품할 예정이다.

지난 12일 실시된 조미김 입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조미김은 8개 지역으로 나눠 입찰을 실시했는데, D식품과 S종합식품이 각각 2개 지역에서 낙찰 1순위에 올랐다. D식품 역시 뇌물 제공 업체였고, S종합식품은 골뱅이통조림을 낙찰받은 업체이기도 하다. 조미김의 경우 문제 업체들이 공급할 분량은 전체 물량의 65%이며 '전과'가 없는 일반업체의 공급량은 35%로 조사됐다.

◇법원 가처분을 이용한 편법 입찰

작년 8월 건빵·햄버거 비리가 불거지자 노대래 방위사업청장은 "밤잠 안 자고 업무혁신에 매진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라며 "직원 부정부패 등 군납 비리를 뿌리뽑겠다"고 했다. 그리고 올해 1월 방사청은 계약심의회를 열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20개 부정 업체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최저 3개월에서 최대 24개월까지 입찰을 금지하는 제재를 가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제재를 받았던 D종합식품 등 문제의 업체들이 3개월 만에 다시 낙찰 1순위에 올랐을까. 해답은 행정처분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법원의 가처분 소송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D종합식품과 S종합식품, S사 등은 방사청에서 행정처분을 받자 이에 불복하는 본안 소송에 앞서 유죄가 선고될 때까지 행정처분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러자 법원은 "공익에 중대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취지로 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문제의 업체들은 뇌물 제공과 입찰담합 등으로 기소됐으나 혐의를 인정할 수 없고 아직 유죄가 나온 것도 아닌데 행정적 불이익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지자체에서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가 드러나 입찰 제한을 받았던 S종합식품 역시 지자체 처분에 대한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을 법원이 받아들인 것을 근거로 골뱅이나 조미김 입찰에 참여해 낙찰 1순위가 되었다고 한다.

방사청은 '난감한 입장'이라고 했다. 비리 업체를 뿌리 뽑겠다고 큰소리쳤다가 '한방' 먹었다는 표정이었다. 방사청 관계자는 "사법부 결정을 근거로 입찰에 나서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면서 "장병 식품과 관련된 중요 사안을 재판부가 어떻게 '공익에 큰 영향이 없다'고 판단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이 업체와 법원에 있다는 취지였다.

◇"업체·방사청·법원이 짜고 솜방망이 처벌"

그러나 방사청이 법원을 이용한 업체의 '꼼수'만을 탓할 처지는 아니다. '가처분 수법'이 처음 등장한 게 아니기 때문. 재작년 돼지고기에 값싼 닭고기를 섞어 군에 납품하다 적발된 D사가 행정처분을 받았으나, 이 업체도 법원 가처분 결정을 근거로 응찰했고 아무런 제재 없이 1년간 식품을 납품했다. 작년 국감에서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정미경 의원도 발암물질이 들어간 식품을 유통시키려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적발된 업체가 군납업체로 선정돼 70억원어치를 납품하는 등 방사청이 군납비리 업체와 재계약을 맺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업계 관계자는 "방사청 측은 업체들이 법원 가처분을 이용할 수 있음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이런 편법 입찰을 차단할 규정을 마련하지 않고 올해 초에도 형식적인 제재를 했다. 결국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고 지적했다. 가령, 식품 입찰 규정에 '뇌물이나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적발돼 행정처분을 받은 업체는 무죄를 선고받기 전까지 입찰에 참여할 수 없다'는 조항 등이 마련된다면 효과 있는 제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부정 업체가 법원 처분을 이용해 낙찰을 받았더라도 나중에 유죄가 나오면 기존 계약을 중단하고 '깨끗한' 업체와 재계약을 맺어야 하는데 그런 조항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더욱이 비리업체가 유죄가 확정되면 다른 업체와 합병해 회사 이름을 바꾸고 입찰에 참가할 가능성도 있는데 이런 편법 응찰에 대한 대책도 방사청이 미리미리 준비해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훈련받는 군인들 자료사진

이달 들어 방사청은 내년 5월까지 식품을 납품할 업체를 잇따라 선정하고 있는데, 문제의 업체들이 낙찰자가 되자 다른 업체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비리 업체들이 반성은커녕 유명 로펌에 거액의 수임료를 주고 법원 가처분을 받아내고 다시 납품업체로 선정되고 있다"면서 "이런 업체들은 대부분 군납으로 성공한 업체들로 어떻게 하면 정부 입찰을 따낼 수 있는지 각종 편법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법원 출신의 한 변호사는 "행정처분에 불복해 법원에 가처분을 내는 게 업체 입장에선 쉬운 일이 아니다"면서 "방사청과 업체의 사전 유착 의혹이 있을 수 있고, 담당 재판부 또한 사회 문제가 된 군장병 식품 비리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판단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