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명의 탈세 혐의와 관련해 미국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는 스위스 은행들이 '비밀주의'에서 또다시 한 발 물러섰다. 미국인의 탈세와 연루된 직원과 제삼자의 명단, 이메일 등을 미국 당국에 넘겨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14일(현지 시간) 로이터는 스위스 현지 언론을 인용, 스위스 정부가 미국 부유층의 탈세를 도와준 은행 직원이나 제삼자들의 명단을 넘겨줄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스위스 연방의회는 은행들이 탈세 혐의를 받는 미국 고객에 관한 이메일 기록을 미국 당국에 넘겨줄 수 것을 허가했다. 이들이 넘겨주기로 한 목록에는 은행 직원들의 명단과 탈세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큰 자산관리가와 법조인, 신탁업자 등의 명단이 포함됐다. 다만 미국인 고객 정보 자체를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미국 당국은 1000명 중 10명꼴로 미국인들이 탈세를 위해 스위스 은행계좌를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크레디트스위스 등 11개의 스위스 은행들은 미국 국민의 탈세를 도와준 혐의와 관련해 미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에도 자국민의 탈세혐의와 관련해 고객과 펀드 이름을 넘겨달라고 요구한 바 있으며, 지난 2월 스위스 자산관리 전문은행인 베겔린을 12억달러 이상 탈세를 도운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스위스는 미 당국의 벌금과 미국 은행 고객의 유출을 막기 위해 미 당국의 조사를 중단시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에벌린 비드머 슐룸프 스위스 재무장관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올해 안으로 미국과 이 문제와 관련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는 1934년부터 은행비밀보장법을 통해 80년 동안 2조1000억달러(약 3107조원)의 외국 자본을 운영해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들이 무기명 계좌를 통해 운영하는 외국 자금은 매년 스위스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009년 OECD가 스위스를 비협조적인 조세은닉처를 뜻하는 '회색국가군'으로 분류하는 등 국제적인 비판여론이 확산되자, 최근 스위스 은행들은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스위스는 이달 초 독일과의 조세협정을 개정하고 무기명계좌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