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崔致遠·857~?)은 무엇보다 문장가다. 10년 넘게 당나라에서 벼슬살이하며 남부럽잖게 행세한 것도 문재(文才)가 밑천이 된 까닭이다. 황소(黃巢)의 난을 진압한 그의 격문(檄文)은 모르는 이가 없다. 칼로 목을 치기는 쉬워도 글로 마음을 꺾기는 어렵다. 그는 또 통일신라에서 드문 국제통이었다. 우리 역사에 흔치 않은 '세계적 지성인'인 셈이다. 그런 최치원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마침 그의 초상화가 몇 점 남아있다. 하지만 서원과 사당에 보관된 초상들은 이분이 그분일까 싶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그린 시기도 모두 19세기 이후다. 앞서 내려오던 초상화를 보고 베꼈을 텐데, 모본(母本)이 사라져 생전의 최치원 얼굴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중에서 이 그림은 화가와 제작 시기가 명기된 초상화다. 조선시대 전통 양식을 따른 극세필(極細筆)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리며 고종의 어진(御眞) 등을 그린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 1924년에 그렸다.

'최치원 초상' - 채용신 그림, 비단에 채색, 123×73㎝, 1924년, 정읍 무성서원 소장.

채용신이 그 좋은 솜씨를 두고 최치원의 얼굴을 밋밋하게 그린 이유는 뭘까. 원본을 옮기는 데 충실할 수밖에 없어서였을 것이다. 의관은 당나라 복식이고 앉음새가 특이해서 눈길이 간다. 최치원은 신발을 벗어던진 채 의자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어째 좀 방정맞게 보인다. 얼굴은 방긋 웃기까지 한다. 문신의 초상에서 좀체 보기 힘든 모양새인데, 바로 스님을 본뜬 자세다. 손에 든 것도 불교식이다. 먼지떨이처럼 생긴 저 불자(拂子)는 세상의 번뇌를 털어내는 도구다. 유불선(儒佛仙)에 두루 밝았던 학자의 면모가 포즈에 살아있다.

말년의 최치원은 난세가 꼴 보기 싫어 떠도는 시비(是非)에 귀를 막고 종적을 감췄다. 시비가 들끓기는 요즘도 마찬가지다. 입은 가볍고 혀는 기름진 세상이다. 최치원이 또 떠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