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와타나베 부인들한테 완전히 당했다."
일본 정부는 작년 10월 말 엔고(円高)를 저지하기 위해 사상 최대인 하루 8조엔에 달하는 엔을 시장에 내다 팔고 달러를 사들였다. 그러나 1주일간 계속된 일본 정부의 시장 개입에도, 70엔대의 초(超) 엔고를 끝내 막지 못했다. 외환시장에서는 일본 정부가 와타나베 부인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와타나베 부인은 외환에 투자하는 일본의 개인투자가를 지칭한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 '정부가 개입해도 엔고 대세를 막지 못할 것'이라는 보도가 잇따르자 이를 믿고 베팅한 일본 개미투자가들이 정부의 시장 개입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JP모건체이스 은행은 "개인들이 정부가 개입한 자금의 절반 정도를 흡수하면서 정부의 시장 개입을 무력화시켰다"고 분석했다.
최근 엔고가 꺾이면서 엔 약세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도 와타나베 부인이다. 엔고가 완화된 것은 근본적으로는 미국 경제의 회복 조짐과 일본의 재정 악화, 일본은행의 금융완화 정책 등이 작용했다. 여기에 개인투자가들이 최근 외환시장에 대거 복귀하면서 달러를 대거 사들이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약세인 엔화 가치를 더욱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초 엔고가 누그러지면서 엔 약세에 투자하는 개인투자가들이 속속 외환시장으로 복귀하고 있어 환율시장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최대 원금의 400배까지 투자
일본 개인투자가들에게 저금리의 엔화를 빌려 고금리 국가의 자산에 투자하는 이른바 '엔 캐리 트레이드'는 구문(舊聞)이다. 지난 2005년부터 일본 개인투자가들은 직접 외환을 사고파는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법 개정으로 외환 거래 회사가 크게 늘어나고, 이들이 개인 고객을 끌어들이자 개인들은 이제 저금리의 엔화를 매개로 해서 다른 국가의 자산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엔화 자체를 사고판다.
개인투자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투자방식은 'FX 마진거래(외환 증거금 거래·키워드)'이다. 실제 통화 교환 없이 일정 금액의 증거금만을 가지고 매매하는 파생상품이다. 소액의 증거금만으로 수십 배 투자를 해서 큰 폭의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가령 25배의 레버리지를 이용할 경우, 5엔의 자본금만 가지고 95엔을 빌려 100엔을 팔고 그에 해당하는 달러를 살 수 있다.
이 거래에 참여하는 개인투자가는 약 100만명에 이른다. 개인들이 주로 계좌를 개설한 52개 외환거래업체로 구성된 일본 금융선물거래업협회에 따르면 FX 마진거래 금액이 2006년 365조엔에서 2009년 2000조엔대로 급증했다. 거래 증거금은 2006년 5179억엔이던 것이 작년 말엔 1조엔을 넘어섰다.
일본 FX 마진거래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다. 개인투자가의 평균 비중은 FX 마진거래의 30%대지만, 외환변동이 극심할 때는 이 비중이 60% 정도로 치솟으면서 시장을 뒤흔들어 놓는다.
◇엔 약세에 불붙이는 개인투자가
외환시장의 개인투자가는 기관투자가와는 동떨어진 투자 스타일을 갖고 있다. 기관투자가들이 하루 중에 몇 번씩 사고팔면서 리스크를 관리한다면, 개인투자가들은 장기 보유가 특징이며, 이른바 '묻지마 투자'로 변동성을 극대화한다. 주식의 경우 장기 보유가 현명한 투자로 평가받지만, 외환의 경우는 다르다. 개인투자가들의 개입으로 엔고와 엔저가 극단적으로 확대되며, 외환시장은 더욱 예측 불허 상태로 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96년 1주일에 평균 5% 정도 등락했던 환율이 작년 3월에는 하루에 6% 등락할 정도로 변동폭이 급격히 커진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샐러리맨 개인투자가들이 많다 보니 주로 점심시간을 이용한 거래가 많아 점심시간 이후에 외환 거래가 급격히 늘어나곤 한다.
일본 정부는 개인투자가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레버리지 규제'를 도입, 2010년에 50배까지 허용하던 레버리지를 작년에는 25배로 낮췄다. 하지만 개인이 법인인 것처럼 등록해 투자할 경우 규제를 받지 않는다. 일부 외환투자 회사들은 편법으로 개인투자가들에게 400배의 레버리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초보 투자가일수록 급증하는 국가부채와 저출산ㆍ고령화로 인해 일본이 국가 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관론에 귀를 기울이며, 엔을 팔아 달러를 보유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2~3년간 지속된 엔고 현상으로 막대한 손해를 보고 시장을 떠났던 일부 개인투자가들도 최근 엔고가 엔저로 바뀔 기미를 보이자 자신감을 얻어 다시 투자에 나서고 있다. 지난 2월 FX 마진거래량이 152조엔으로 전년 동기보다 27%가 늘어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유일한 재테크 수단
정부가 규제를 해도 FX 마진거래의 증가 추세를 막기는 쉽지 않다. 장기 불황 20년에 '재테크 불모지대'로 변한 일본에서 유일한 재테크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주식은 20년 전에 비해 4분의 1 토막 나고, 부동산은 오른다는 말이 실종된 상태이다. 은행 금리는 '제로'이다 보니 외환이 거의 유일한 재테크 수단이다. 개인들의 외환 투자를 돕기 위해 외환 매매를 자동으로 해주는 소프트웨어까지 등장했다.
외환 거래업자들이 신용카드로 외환거래 증거금을 대출해 주기도 하고, 신규로 고객을 소개해주면 1만엔을 주는 등 판촉 경쟁도 벌이고 있다. 초보 투자자용 신상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가령 1시간 동안 해당 통화가 오를 것인가, 내릴 것인가 두 가지 변수로만 투자하는 상품도 등장했다. 주로 달러와 호주달러에 집중됐던 투자 대상 화폐도 위안화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하지만 FX 마진거래로 실제로 돈을 번 사람은 많지 않다는 분석이다. 와타나베 부인들의 투자 특성이 드러나면서 이들의 투자 패턴을 역이용, 돈을 버는 해외투자가들도 많다. 해외투자가들은 이른 아침에 대량 거래를 하는 식으로 외환시장을 주도해 개인투자가들에게 결정타를 날리기도 한다. 개인들이 잠자는 시간에 환율이 크게 변동하면 대응을 못 해 손실을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 FX 마진거래 회사들은 손실이 무한대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손실 폭이 일정 한도를 넘으면 강제로 매매시킨다. 자고 일어났더니 깡통계좌로 바뀌어 있더라며 한숨 쉬는 이들도 많다.
☞ 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
저금리의 엔화를 빌려 고금리 국가의 주식·채권 등에 투자하는 금융거래 기법. 일본뿐만 아니라 해외 기관 투자가도 많이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엔 캐리 투자가 늘어나면 엔화 가치가 떨어지고, 엔 캐리 투자 자금이 몰리는 통화는 가치가 상승한다.
☞ FX(foreign exchange) 마진거래
개인 투자가들이 실제 통화 교환 없이 업자에게 일정 금액의 증거금만을 맡기고 통화를 거래하는 외환 투자 방식을 말하며, 증거금의 수십 배에서 수백 배까지 투자할 수 있어 투기성이 높다. 외환 증거금 거래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줄여서 FX투자라고 하는데, 개인들이 하는 대부분의 외환 투자가 이 방식이다.
☞ 레버리지(leverage)
원래는 ‘지렛대’라는 뜻으로 작은 힘으로 무거운 사물을 들어 올리듯, 자기 자산을 담보로 외부로부터 더 많은 자금을 빌리는 것을 뜻하는 금융용어다. FX마진투자도 적은 증거금을 내고 이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베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레버리지를 이용한 투자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