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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한국 문화
이희수 지음|청아출판사|364쪽|2만원

"사치와 호화를 일삼는 백성들이 진귀한 외래품만 선호하고 토산품을 배척하니 문란하고 풍속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하여 법령으로 이를 시정하고자 하니 어기는 자는 법에 따른 징계를 면치 못하리라."

약 1200년 전 흥덕왕은 참다못해 이런 법령까지 내렸다. 부유층의 외제 사치 풍조는 통일신라 시대에도 골칫거리였다. 금지령은 세밀했다. '진골은 타고 다니는 수레에, 육두품 이하는 가마와 침상에, 향료인 동남아산 자단과 서아시아산 침향을 쓰지 못한다' '육두품과 오두품은 (아랍식 모직 깔개인) 구수와 탑등의 사용을 금한다'…. 그래도 신라 귀부인들은 아라비아 남부산 최고급 장미수에 안달했다.

통일신라만 해도 문화는 글로벌했다. 8~9세기경 세계적 대도시인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경주까지 교역품은 6~8개월이면 도달했다. 가히 '동시 패션 시대'였다. 경주 황남동 미추왕릉 4호묘에서 출토된 구슬 목걸이(보물 제634호)에 새겨진 인물상만 해도 서양식 머리에 하얀 피부, 오똑한 코, 푸르고 깊은 눈동자, 빨간 립스틱까지 이국적 풍모가 물씬하다. 신라 38대 원성왕(785~798년) 능으로 추정되는 괘릉 앞 무인 석상은 키 257㎝에 이슬람식 터번을 썼다.

우리가 전통 악기나 토착 음악이라고 여기는 것 중에도 고대 실크로드를 따라 흘러든 것이 많다. 비파의 연원은 이란의 고대 악기 바르바트, 타악기인 박은 서역 악기의 일종, 태평소도 페르시아 악기 사나이가 원조였다.

전통 소주 역시 칭기즈칸 몽골 시대 '아라기'(아랍 증류주 '알 아락'의 음역)에서 유래했다. 연금술로 대표되는 아랍의 수준 높은 과학 실험의 산물은 한반도로 넘어와 서민의 애환을 달래는 술이 됐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오랑캐' 몽골을 통해 숱한 선진 학문과 과학 기술이 유입됐다. 이슬람 역법을 빌려 우리식 음력이 창안됐고, 수많은 과학기기의 발명과 정비도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 과학의 영향을 입은 것이었다. 세종 시대 과학 르네상스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들어 이슬람 문화의 흔적은 점차 희미해진다. 유교가 국가 이념으로 강화되면서 관심은 중국에 집중됐다. 이슬람을 다시 만난 것은 1970년대 초 오일 위기를 만나면서였다.

책의 압권은 처용의 재조명이다. 처용에 대해서는 연구 논문만도 300편이 넘지만 여전히 논란거리다. 저자는 처용을 올바로 해석하려면 그가 등장한 9세기 말 국제 정세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처용은 통일신라 후기 879년경 헌강왕 때 뱃길을 따라 개운포(현재 울산항)로 흘러든 이방인. 그 무렵 중국 동부 해안 지대는 황소의 난(874~884)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소금장수 황소가 조정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은 무차별 살육과 약탈로 내달았다. 아랍-페르시아 계통의 무슬림 상인들은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흩어졌다. 다수는 중국 사회에 스며들어 회족의 선조가 됐지만 해상으로 탈출해 신라로 피신한 이들도 있었다. 저자는 처용이 그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가 주목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쿠쉬 장군의 영웅 서사시에는 중국 내 혼란으로 페르시아인들의 안전이 불안해지자 신라로 망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국립국악원 처용무 공연 장면.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처용의 정체를 두고 이희수 교수는“중국‘황소의 난’때 피란 온 무슬림이 유력하다”고 말한다.

처용가를 당시 창궐한 역병과 관련 짓는 해석과도 들어맞는다. 8~9세기 신라는 전염병으로 왕들마저 목숨을 잃는 등 곤욕을 치렀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의학 지식을 보유한 이슬람권에서 온 처용의 처방전은 신라에서 환영받았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처용이 사악함을 물리치는 부적과 춤, 민간 신앙으로 발전한 배경이다.

1991년 '한-이슬람 교류사'로 나왔던 책을 증보 개정판으로 냈다. 저자는 '걸프해에서 경주까지 1200년 교류사'를 되짚으며 우리 문화의 깊숙한 단층의 한꺼풀을 벗겨 보인다.

"우리 문화 속에 밀려든 다른 문화의 요소와 전파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문화의 뿌리를 바로 찾고 그 성격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다"는 저자의 말은 지당하다. 다만 이슬람 옹호론이 지나쳐 보이는 대목도 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자살 테러에 대해 "모든 것을 빼앗긴 자가 자신의 것을 빼앗아 다 갖고 있는 상대에게 저항하는 것은 명백한 정당방어"라는 해석이 다수의 공감을 얻을지는 의문이다.

국내 거주 무슬림이 4만5000명에 이른 21세기 다문화시대, 한 번쯤 넘겨볼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