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인천에서 20대 여성이 낙지를 먹다 질식한 것으로 사고사(死) 처리된 일명 '산낙지 질식사 사건'은 2년 만에 위장·살해 의혹을 받던 남자 친구가 검찰에 구속되면서 일단락됐다. 물론 남자 친구를 범인이라고 확정할 수 없고, 앞으로 긴 재판 과정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여기까지 온 것은 숨진 여성의 아버지 윤성호(49)씨의 치열한 노력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 처절했던 2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 의심하기 시작했나?

"2010년 6월 초순 딸아이를 화장하고 삼우제를 지낸 직후였다. ○○화재 보험증서가 딸아이 앞으로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2억원짜리 생명보험이었는데 수익자가 배우자 김○○(남자 친구)로 돼 있었다. 의심을 했지만 말하면 도망갈 것 같아 직접 말하지 않고 뒷조사만 했다. 가슴이 찢어졌지만 산낙지를 산 가게, (딸이 숨진) 모텔을 돌아다니면서 증거와 증언을 수집했다."

―어떤 증거와 증언을 수집했나?

"사망 원인이 낙지와 무관하다는 병원의 의무 기록을 입수했다. 김○○가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거짓말하는 녹취록도 확보했고, 보험금이 빠져나간 적이 없는 딸의 금융계좌, 보험금 수령인을 김○○로 바꾼 위조된 보험 배서 신청서 등이다. 그를 구속하는 데 중요한 증거가 됐다."

―변호사들은 처음에 어떤 조언을 했나?

"전국을 돌며 17명의 변호사를 만났다. 다들 비관적으로 말했다. 딸아이의 시신을 화장해서 증거가 없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너무나 후회했다. 그때 내가 화장을 안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후회한다. 정말 엄청나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라도 안 하고 손을 놔 버리면 딸은 억울해서 어떻게 하나."

―경찰에 재수사를 요구한 것은 언제인가?

"보험사에서 김○○에게 보험금을 지급해 버렸다. '우리도 노력할 만큼 했다'는 것이다. 소식을 듣자마자 인천으로 올라갔다. 그는 이사 갔고 연락도 닿지 않았다. 경찰에 재수사를 요구했다."

―재수사는 순조로웠나?

"그 후로 사는 게 아니었다. 고소장을 넣고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진술하러 다니느라. 경찰에선 서류 한 장 떼는 데도 2~3시간 걸렸다. 직장은 뒷전이었다. 인천에서 내려와 수사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소리를 들으면 하루 만에 다시 올라갔다. 2년 동안 직장이 있는 울산에서 인천까지 50여 차례 오갔다. 돈이 문제가 아니지만, 오가는 데만 족히 2000만원은 쓴 것 같다."

―경찰에 서운했나? '사건 초기에 조금 더 그를 의심했다면…' 하는.

"담당 형사와 담당 검사가 여기까지 끌어준 것이다. 은인이다."

―딸이 꿈에 나타난 이야기가 많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딸이 억울한 표정으로 배를 움켜쥐면서 '배가 아프다'고 말했다. 아내도 작년에 거실에서 딸 꿈을 꿨다고 했다. 아내가 동생이랑 같이 있던 딸에게 '이리 와' 하니까, '못 가요' 하더니 머리맡으로 다가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 나 이제 가요' 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고 했다. 아내와 함께 그 꿈이 무슨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계기가 됐나?

"지역신문 기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취재하고 싶다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너무 지쳤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했다. 방송사와는 7일 동안 촬영했다. 촬영을 끝내고 PD와 소주를 마시는데, PD가 '아버님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다'고 하더라. 내가 그런가 싶었다."

―최근 김○○를 만난 일이 있나?

"지난달 30일 검사의 도움으로 판사의 허락 아래 영장실질심사에 참여했다. 살이 떨렸다. ○이고 싶은 마음, 그 이상의 마음이었다. 아내가 준 청심환을 먹었는데도 진정이 안 됐다."

―앞으로 많은 과정이 남아 있다.

"한 달 전만 해도 온 천지가 벽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많은 분이 도와줬다. 이제 세 가지 문 중 하나가 열린 것뿐이다. 구속이 첫 번째 문, 1심과 2심 무기징역이 두 번째 문, 세 번째 문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는 것이다."

―무죄가 될 수도 있는데, 받아들일 수 있나? (그는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

"그가 무죄라면 세상에서 못 산다. 이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살겠나. 만약…이란 말도 생각하기 싫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언제쯤 딸을 마음속에서 떠나 보낼 수 있을까?

"아직 영혼을 보내주지 못했다. 억울하기 때문에. 절에 위패를 그대로 두고 있다. 사건이 마무리되면 천도재를 한 번 더 할 것이다. 그때 보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