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진화
폴 에얼릭·로버트 온스타인 지음|고기탁 옮김 | 에이도스|276쪽|1만5000원
'쉽볼렛'과 '십볼렛'.
앙숙지간인 길르앗 부족과 에브라임 부족을 구분한 것은 이 두 발음이었다.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길르앗 병사의 질문에 '쉬(sh)' 발음을 못해 목이 달아난 에브라임인이 4만2000명. 아마 길르앗인 중에도 혀를 잘못 놀려 숨진 이가 있었을 것이다. '피아(彼我)'의 구분은 그만큼 살벌했다.
전쟁에서 정작 군인을 피 끓게 한 것은 신념보다 가족애였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스파르타는 젊은 투사와 늙은 투사를 함께 전장에 내보냈다. 이들 간의 동성애는 부대를 유사가족처럼 만들었고 거기서 나온 전우애는 적들을 떨게 했다. 2차 대전 초반 독일군이 승승장구한 비결도 같았다. 고향이 같은 병사들을 한 부대에 배속시켰고 사상자가 나오면 동향의 병사로 채웠다. 이렇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를 묶고 가른 경계의 기원은 '우리'의 다른 이름인 '가족 의식'이었다.
'우리' 의식은 일상에도 흔하다. 공공연히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고, '나' 대신 '우리'를 주어로 쓴다. '우리' 아니면 '타인', 그 사이에 무엇은 없다. 일치된 상징과 언행들은 '우리' 의식을 강화하는 한편 '타인'에 대한 배타심과 적개심을 키운다. 축구장에서나 정치 집회장에서나 '우리'가 아닌 상대는 '원수'이자 '악마'다.
◇가족에서 시작된 인류의 진화
'우리'의 시작은 가족이었다. 약 6만년 전 소집단에서 태동한 인류가 지구를 점령한 비결도 가족 간 유대였다. 그 속에서 공감과 협동심이 진화했다. 긴 시간과 수고를 요하는 육아 문제를 초기 인류는 공동 양육으로 해결했다. '핵가족'은 근래에 출현한 제도다. 혈연에서 출발한 가족은 확장과 변용을 거듭했다. 부족·민족·인종 모두 확장된 가족의 한 형태다. 유사가족도 줄을 이었다. 셰익스피어 시대 용병들은 서로를 '형제'라 불렀다. 이탈리아 마피아도 패밀리라 칭하고 일본 회사들도 가족경영을 추구한다. 가족의 진화는 '국가(國家)'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타인'이 고안됐다. '이방인' '이교도' '오랑캐'…. 인종적·종교적·정치적 타인들은 흔히 악마로 묘사됐다. '우리'에 대한 충성은 대학살로 치닫기도 했다. 홀로코스트에 동참한 많은 나치 당원들도 스스로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사회적 암세포'를 제거한다고 믿었다.
◇공감 능력의 일대 도약이 필요
저자는 이제 인류가 '우리'와 '타인'을 나눠오던 가족 의식에 일대 변화를 시도해야 할 시점에 왔다고 말한다. 세계가 직면한 기후변화나 생물다양성 감소, 환경오염, 경제 불평등 심화, 핵전쟁 위협 등은 지금까지의 편협한 '우리' 의식으로는 넘기 어렵다. 공감의 대역을 넓히고 가족 의식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인간의 공감 능력의 진화에 기대를 거는 데는 신경과학적 근거가 있다. 인간은 뇌의 거울신경을 통해 타인의 감정을 인식할 때 자신도 같은 신경망을 가동한다. 신생아는 생후 44분 정도가 지나면 보호자의 표정을 흉내 낸다. 뇌가 커진 것도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 결과다. 우리는 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직장 동료가 왜 눈짓을 하는지 알고 싶어하고, 상사가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진짜 이유를 놓고 고민한다. 인류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모방하는 과정에서 그들로부터 뭔가 배우는 능력 때문에 발전해왔다.
실제 공감의 힘과 타협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증거는 의외로 많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장약을 채우고도 격발은 하지 않은 채 발견된 소총이 허다했다. 총은 들었지만 차마 적에게 쏘지는 않은 것. 2차 대전 때도 약 85%의 군인이 적에게 발포하지 않은 것으로 추산된다.
◇'보다 큰 우리'를 생각하라
"호모사피엔스는 이제 청소년기 단계다. 어른이 되기 위해 보다 확장된 가족 의식을 길러야 할 때"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공감 능력의 확장을 위해서는 교육과 대중매체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학교에서는 다른 팀을 쳐부수기 위한 우리끼리의 협력이 아니라 '우리'를 극복하기 위한 협동을 강조하는 교육을 앞세워야 한다. 직소 퍼즐 같은 것은 다른 학생을 타인이 아니라 '보다 큰 우리'로 보는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의 변화가 결국엔 행동을 낳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호텔에서 "환경을 위해 수건을 재사용해 달라"라는 안내문 대신 "이 방을 사용한 대부분의 사람이 수건을 재사용했다"라는 문구를 넣었더니 효과가 33% 높아졌다. 전기요금 통지서에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전력량'을 함께 알려주니 한 해 전력 소비량이 2% 이상 줄었다.
각각 인구생물학과 신경심리학으로 손꼽히는 스탠퍼드대 원로 교수들이 대중을 향해 쓴 책이다. 무한 경쟁의 시대, '사해동포주의'식 메시지는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학술 증거와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성찰은 긴 여운을 남긴다. 글로벌 이슈의 해법으로 제시된 '공감의 진화'이지만 우리 사회 내부의 골 깊은 '피아 적대'에 대한 처방으로도 손색이 없다.
['공감의 진화' 속 말·말·말]
"인간의 협동을 가능케하는 것은 공감 능력 덕분이다. 두살배기 아이의 근처에 뭔가를 떨어뜨려 보라. 아이는 당신을 불러 세워 도와주려 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연상시키는 사람·장소·사물을 선호한다. 치과의사(dentist) 중에는 데니스나 데니즈라는 이름이 많다. 루이스라는 이름의 사람들 상당수는 세인트루이스에 산다."
"1950년대 에스키모 이누이트족은 로마가톨릭과 성공회의 선교사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서로 증오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