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교수형에서 목에 줄이 묶여 발버둥치는 엄마를 보며… 총탄에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튄 형의 머리

5월에 지하감옥에 끌려들어 간 신씨가 다시 햇빛을 본 것은 11월이었다. 부자(父子)는 군중과 함께 처형장에 서 있었다.

끌려나온 사형수는 엄마와 형이었다. 먼저 엄마의 차례. 교수형을 앞두고 처형장에 앉은 엄마는 군중을 둘러봤다. 신씨는 엄마의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사형이 집행됐다. 눈가리개 없이 목에 줄이 묶인 엄마는 한참을 발버둥치다 숨을 거뒀다. 신씨는 엄마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형은 엄마와 달리 나무 기둥에 묶여 총살당했다. 총성과 함께 형의 머리를 기둥에 고정하기 위해 묶어둔 밧줄 사이로 총탄이 비집고 들어갔고,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신씨는 이 광경에 공포와 충격을 받았지만, 형의 죽음 역시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난해 국회 외통위 국감에서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이 통일부를 통해 제공한 북한 수용소 사진. 14호 관리소-평남 개천.

◆신씨, 국내 입국에선 가족의 밀고자를 다른 사람으로 꾸며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는 비난이 무서워 숨겼다”

신씨는 탈출 이후 한국 땅을 밟기 전, 가족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냈다.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 밀고자는 신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신씨가 한국에 들어온 직후, 국내 언론들은 신씨의 꾸며낸 이야기를 그대로 보도했다.

신씨는 “숨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는 비난이 무서웠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가족보다 경비원들에게 더 충실했다. 가족은 가족 모두에게 스파이였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경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지를 나는 알고 있었다”고 했다.

신씨는 말한다.

“외부인들은 수용소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리를 때리는 것은 군인들만이 아니었다. 수감자들 스스로 서로에게 못되게 군다. 공동체라는 의식 같은 것은 아예 없다. 나는 그런 야비한 수감자 중 하나였다.”

신씨는 용서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도 했다. 다만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정치범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릴 수 있다면, 그것만이 자신의 거짓말과 인생을 용서받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