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 개론'을 본 즈음, 첫사랑에 실패한 남자가 주인공인 연애 소설을 막 끝낸 즈음이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인데, 그 비밀스러운 모임에는 실연당한 여자와 남자들이 오전 일곱 시에 모여 아침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장면을 쓰면서 '자신의 실연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회한이 이 조찬 모임에 처연한 색채를 덧씌웠다. 그런 이유로 이곳은 죽음을 앞둔 노인들의 새벽기도회를 연상시켰다'라고 썼었다.

첫사랑은 대개 실패의 기록들이다. '건축학 개론'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 건, 그것은 대개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스무 살에 같은 수업을 듣는 다른 과 선배를 좋아해서 고백했는데, 거절당했다.' 이 문장에서 사라진 것은 '죽도록' 고민했다는 것이고 '한마디'로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때, 내 마음속에는 거절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가 자라나기 시작한 것 같다. 이후의 모든 연애의 시작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로 아프게 맞추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고. 그것은 마치 사랑 노래의 '후렴구'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됐다.

영화 '건축학 개론'의 승민 역시 같은 수업을 듣는 음대생 서연에게 첫눈에 반한다. 우연히 같은 동네인 '정릉'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함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숙제를 하고, 단짝 친구가 된다. 서연이 자신의 같은 과 선배를 좋아해서 '건축학 개론'을 듣게 됐다는 걸 알게 된 후, 승민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내내 고민하며 괴로워한다. 수많은 고민 끝에 고백을 결심한 날, 사소한 오해로 서연과 멀어지게 된 승민은 건축가가 된다.

유채꽃밭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제주 앞바다. '건축학 개론'의 주인공 승민과 서연은 제주에서 부서진 집을 다시 지어가면서 어긋난 첫사랑의 기억과 상처를 더듬는다.

그리고 15년의 세월이 지난 후, 서연은 승민이 일하는 건축사무실로 불쑥 찾아온다. 건축을 의뢰한 고객으로 말이다. 서연은 제주도에 있는 아버지의 오래된 집을 다시 설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승민은 자신의 첫 작품으로 서연의 집을 짓게 된다.

이 영화가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을 자극하는 요소는 무수히 많다. 특히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올 때, 김동률의 마성의 저음 앞에 무너지지 않는 청춘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가 부른 '취중진담'은 또 어떤가. 노래방에서 '취중진담'을 부르며 오열하는 인간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고백한 후배의 기억 저편에는, 좋아했으나 고백하지 못한 첫사랑의 상처가 또렷이 남아 있다. 말하자면 전람회의 노래는 90년도 학번 공통이 가진 실패한 사랑의 후렴구인 셈이다. 이 영화의 시작이 '기억의 습작'이라면 이 영화의 마지막은 '취중진담'이 아니었을까.

어린 승민과 서연이 살던 정릉은 지금은 사라지고 있는 옛날 서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동네 사이사이에 좁은 골목이 살아있고, 그 골목길 사이로 목련이나 철쭉이 심어진 담벼락 낮은 주택들이 끼어 있고, 골목을 걸어 나오면 시장의 다른 골목들이 펼쳐지는 풍경들. 재개발도 재건축도 뉴타운도 없던 시절의 평범한 동네의 모습들 말이다. 우리가 '고향'이라 말할 수도 있는 모습. 그 사라져가는 풍경 속에 승민이 'GUESS'의 짝퉁인 'GEUSS'를 입고 걷는 모습을 보면, 어쩔 수 없이 1990년대의 기억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어깨에 '잰 스포츠' 가방을 메고,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들으며 수업을 듣고 PC통신을 하던 그 시절로. 벚꽃 잎이 바람에 날리며 시작되는 '4월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처럼 가슴 설레는 것이다.

첫사랑의 기억을 찾아 15년 만에 승민을 찾아온 서연이 자신의 집을 고쳐달라고 말한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은유다. 영화의 제목이 '건축학 개론'인 것도, 그들이 한 시절의 기억을 복구하듯 무너진 집의 담벼락을 세우는 것도, 실패한 첫사랑을 떠올릴 때 아득히 밀려오는 통증 때문이듯 말이다. 과거의 정릉에서 현재의 제주도로 교차하는 과거와 현재의 아득한 거리만큼 이제 막 결혼을 앞둔 승민과 이혼한 서연도 많이 바뀌어 있다. 부서진 집을 개축하면서 이들이 과거에 오해로 어긋난 기억과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일은 그러므로 회한처럼 남는다. 과거의 사랑이 '오해'로 끝났다 해도 '이해'로 마무리되진 않는 것이다.

유학을 앞둔 승민은 정릉의 옛 집에서 밥을 먹다가 문득 엄마에게 "이 집이 지겹지도 않아?"라고 묻는다. 자신이 버린 짝퉁 'GEUSS'티를 겹쳐 입은 늙은 엄마가 마음 심란한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집이 지겨운 게 어딨어. 집은 그냥 집이지." 엄마의 대답을 꽤 오랫동안 생각했다. 첫 사랑은 그저 첫사랑인 것일까.

●건축학 개론: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작품. '파수꾼'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신예 '이제훈'과 아이돌 가수 출신인 '수지'가 대학시절 승민과 서연으로, 엄태웅한가인이 15년 후의 승민과 서연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