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는 래(來) 사월 일일부터 동 삼일까지 계동 사립중앙학교내에셔 서화전람회를 개(開)한다는대… 관람객의 다수 참관(參觀)을 망(望)한다더라." 조선일보 1921년 3월 19일자에는 우리 미술사에 남은 역사적 전시회의 안내 기사가 실렸다.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을 빌려 조촐하게 개최한 '서화협회전'은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 전시회였다. 전시회를 주도한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이다.

고희동은 젊은 날 동양화를 배우다가 서양 그림에 자극받아 1908년 23세 때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갔다. 미술 유학을 떠난 것도, 유화(油畵)를 배운 것도 조선인 중 최초였다. 다른 조선인 유학생들 눈에 고희동은 "동떠러진 길을 걷고 잇는 이단자"였으며 "이역(異域) 객창에서 친구 하나 업시 고적하게" 지냈다. 유학 시절 어느 날 고희동은 "교실에 드러갓더니 빨가버슨 미인이 몸을 이리저리 틀며 포즈를 지정하라고 하는데 라체 모델에 대하야 말로는 드럿든 것이나 별안간 당하고 보니 당황"하여 '얼굴 붉힌' 청년이기도 했다.(1938년 1월 3일자)

고희동이 1915년 그린 유화 '부채를 든 자화상'(왼쪽), 동양화로 돌아간 고희동이 1930년 선보인 화조도(花鳥圖·1930년 1월 1일자).

고희동은 1915년 귀국하여 휘문·보성·중동 등 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1918년에는 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새로운 미술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화가가 제대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1929년엔 기고를 통해 궁궐 화가인 화원(畵員)들을 장색(匠色·물건 만드는 사람) 정도로 천시했던 조선시대의 풍토를 언급하며 "그 시대상이 그러하엿스니 미술이 멸망된 것"이라고 통렬히 비판했다.(1929년 1월 1일자) 1933년에는 조선견직(絹織·비단)회사의 의뢰를 받고 비단 보자기 무늬 도안을 그려줬다가 돈을 못 받자 오백원(약 1000만원)을 내놓으라며 회사를 상대로 조선 최초의 그림값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1933년 5월 6일자)

그러나 이 근대 미술 선구자는 1925년쯤 유화 작업을 돌연 중단하고, 동양화로 돌아갔다. 1927년 이후 4차례에 걸쳐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고희동의 그림은 모두 동양화다. 그는 왜 유화 붓을 놓았을까. 90년 전 서양화 개척자로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고희동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림 그리는 자기를 보고 여러 사람이 "부대 조각에 고약칠하는" 것이라며 "저런 우스운 짓을 하러 단길랴고 류학까지 가?" 하며 심하게 조롱했던 일을 잊지 못하며 자신의 처지를 "방향을 분간치 못할 가시덤불 속에 잇다"고 털어놓았었다.(1938년 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