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고리 원전 1호기의 '블랙아웃(station blackout·발전소 대정전)'은 사실상 수명이 다한 35년 된 노후 비상디젤발전기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일어났다. 전문가들은 "5년 전 고리1호기 수명 연장 시 미리 교체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사고"라면서 "다른 원전의 비상디젤발전기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도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수명 연장 시 교체했어야

국내 최초의 원전인 고리1호기는 2007년 30년을 마친 뒤 정부의 안전점검을 거쳐 10년간 연장운전에 들어갔다. 당시 운영사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장기부터 심장까지 다 교체했다"고 했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비상디젤발전기는 '성능에 문제가 없다'며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한수원 안팎에서는 '교체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고리1호기 폐기론자들은 30년 넘은 비상디젤발전기를 안전성 문제의 핵심으로 공격했다. 제무성 한양대 교수(원자력공학과)는 "비상발전기는 10년에 한 번 쓸 일도 없다 보니 경제성 논리에 밀린 듯하다"며 "성능 검사에서 문제가 없다 해도 수명 연장 때 바꿨으면 이번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수원은 "고리1호기 블랙아웃은 비상발전기 밸브에 들어간 이(異)물질 때문"이라고 15일 밝혔다. 이물질로 인해 밸브가 열리지 않으면서 발전기 엔진에 시동을 걸 압축공기가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 보통 비상발전기에는 밸브가 두 개 이상 설치돼 있어 한 개가 고장 나도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고리 1호기 제품은 설치 34년 된 구식 모델(영 GEC 제작)이어서 밸브가 하나밖에 없다.

한수원은 지난해 4월 "2013년까지 290억원을 들여 비상디젤발전기를 교체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고리1호기의 수명연장은 2017년까지다. 왜 10년 쓸 수 있을 때 바꾸지 않고 수명 연장 종료를 4년 앞두고 바꾸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팽배하다.

문제의 비상발전기 - 지난해 4월 15일 부산시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를 방문한 국회 지경위 소속 의원들이 김종신 한국수력원자력 사장(맨 오른쪽)의 안내를 받으며 고리1호기 비상디젤발전기를 살펴보고 있다.

설치 20년 넘은 노후 비상발전기 수두룩

현재 국내에는 모두 21기(시운전 제외)의 원자로가 가동 중이다. 원자로 1기마다 2대씩 비상디젤발전기가 있다. 이 중 고리1호기를 포함해 설치한 지 20년이 넘은 게 18대나 된다. 황일순 서울대 교수(원자력공학과)는 "한수원의 정기 검사에 작년 정부의 정밀 안전 진단까지 받은 비상발전기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검사가 제대로 이뤄졌을지 의문"이라며 "정밀 재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순흥 KAIST 교수(원자력 및 양자공학과)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에도 지진 직후 13대의 비상발전기가 모두 돌아갔다"며 "우리 원전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정밀 점검을 했는데도 비상발전기가 작동하지 않은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의 비상발전기는 지진 직후에는 정상가동됐지만, 이후 쓰나미가 덮친 후 냉각수 공급용 해수 펌프가 침수되면서야 1대를 빼고 모두 작동 불능에 들어갔다. 제무성 교수는 "쓰나미에 대비하려면 울진1·2호기에 있는 것과 같은 공랭식 비상발전기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랭식 발전기는 바닷가에 있는 펌프가 냉각용 바닷물을 퍼올려야 하는데, 쓰나미가 닥치면 펌프가 잠겨 발전기까지 무용지물이 된다.

제 교수는 "울진의 비상발전기는 공기의 대류로 작동하기 때문에 해수 펌프가 필요 없다"며 "다른 원전의 비상발전기도 방수처리나 방벽을 높이는 것보다 공랭식으로 바꾸는 것이 쓰나미 대비에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3월 16일 A6면 '34년된 비상발전기' 기사에서 고리 1호기의 비상발전기는 미국 GE가 아니라 영국 GEC가 제작한 것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