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3·1운동이 분출했을 때 민족대표 33인을 뽑아 세운 주역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름도 올리지 않은 무욕(無欲)의 운동가. 임시정부 수반 같은 번듯한 직책도 맡은 적이 없지만 이승만, 서재필, 윤치호 같은 쟁쟁한 애국지사들의 후원자요, 스승이며, 정신적 지주였다.
모두 월남 이상재(1850~1927·사진)를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의 거인이 그렇듯 그를 한마디로 말하기란 어렵다. 그런 그의 일대기를 5권으로 펼친 '민족의 스승 월남 이상재'(한국학술정보)가 출간됐다.
토요신문 논설 고문인 천광노 한국정신(더 잘 세울)문화연구원장이 4년을 바쳤다. 미국까지 넘나드는 현장 답사로만 1년여, 국내외에서 모은 자료는 벽 한쪽을 채우고도 남는다고 했다. 철종 2년(1850년) 몰락한 선비의 후손으로 나서 개화와 항일·독립운동에 동분서주하다 78세 나이로 눈감기까지 한평생이 2000여쪽에 걸쳐 대하소설처럼 펼쳐진다. 모친 박씨의 태몽 '목이 잘린 용' 이야기부터 선생의 호가 '남'쪽 고향에 두고 온 만삭의 아내 '월'예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대목까지 소소한 일화들도 흥미롭지만, 월남의 무릎에 안겨 자란 손녀 이차순 권사의 회상기 같은 관련 인사들의 증언과 자료는 그 자체로 소중한 기록이다.
월남은 기독교인이었으나 천도교·불교 지도자와 손잡고 3·1운동을 지휘했고, 그의 애국 사상은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까지 감화시켰다. 1924년 조선일보 4대 사장으로 취임해 민족계도에도 앞장섰다. 당시 독립운동가 신석우는 스승으로 모시던 월남을 찾아가 '해외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임시정부보다 신문이 더 중요하다'며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 인수를 상의하며 사장직을 제의했다. 1927년 2월 15일에는 조선일보 사장으로서 일제하 최대 좌우합작 운동인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됐으나 3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1927년 4월 7일 국내 최초 사회장으로 충남 한산 선영에 모셔진 데 이어 1957년 이승만 전 대통령 지시로 경기도 양주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고 1986년 4월 종묘시민공원에 동상이 섰다. 저자는 월남이 평생에 걸쳐 다른 누구를 탓하지 않았고 과거를 묻지 않았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