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섭 중앙대 국제대학원 객원교수

우리나라 보수층은 새누리당(옛 한나라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 정체성을 지키는 데 기여해주길 기대해 왔다. 하지만 당의 도덕성이 추락한 데다 특히 정체성 변질로 이들의 좌절감은 깊어지고 있다. 정강정책에서 '보수'라는 용어를 삭제하자는 의견이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나왔을 때부터 이 당의 정체성 변질은 예고됐다. 마침내 새 정강정책인 '국민과의 약속'에서 좌(左)클릭이 드러난 이후 새누리당에 대한 보수 진영의 비판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보수층이 새누리당의 모호한 정체성에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이 정당은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기본 철학을 선명하게 정립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 인식이나 대북 정책에서 어정쩡한 입장을 취해온 데다 당내 분열과 부정부패 등으로 당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민주사회의 이념이 추구하는 목표는 정당을 통해 실현되는 바 정당이 부패하면 그 정당의 지지층도 오명을 쓴다. 보수층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가 모든 정책의 토대가 돼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해오면서도 이를 진정으로 대변할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아쉬운 대로 새누리당에 대한 기대를 접지 못해왔다.

미국은 어떤가. 진보와 보수를 대변하는 민주당과 공화당은 복지·이민 등 일부 정책은 다르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양자가 공유하는 기본 가치다. 정권이 바뀌어도 미국의 대(對)북한 정책이 거의 불변인 것은 그들이 받드는 가치의 공통성 때문이다.

공당(公黨)은 국익에 맞는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해야 한다. 새누리당 비대위는 당의 정체성에 진보색이 들어가면 국민의 지지 기반이 확대될 것이라고 판단할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변질이 과연 득표에 도움이 되느냐다. 새누리당은 보수 색채 때문에 최근 여러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민심이반(民心離反)의 원인은 실정(失政)이지 '보수'가 아니다. 보수든 진보든 비리와 부패는 용서하지 않는다.

모바일 투표나 SNS도 진보를 무턱대고 편들지는 않는다. 기성 정치에 식상한 젊은 세대는 국민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봉사할 것으로 기대되는 정당과 인물의 편이다. 소통 위기의 진원(震源)도 진정성의 결여에 있다. 새누리당은 북한 핵무기와 인권 문제 등은 보편적 가치를 근거로 판단하고 복지 문제에서는 좌파적 포퓰리즘에 기인한 국가 재정 위기를 초래하지 않을 최선의 복지 플랜을 국민에게 정직하게 제시해야 원칙에 충실한 공당으로서 국민의 신뢰와 감동을 살 수 있다.

'보수 콤플렉스'는 공연한 패배 의식이다. 미국도 올해 대선을 치르지만 공화당 예비선거에선 누가 진짜 보수인가가 이슈다. 우리나라 역대 대선 결과를 봐도 1987년 민주화 이후 당선된 대통령 5명 중 3명은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았다. 1997년 김대중 후보도 당시 보수정당인 자유민주연합과 공동 정권 합의로 당선됐다. 이 나라에는 보수 본연의 가치에 자긍심을 갖고 국가 장래를 걱정하는 여러 양심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또한 진보와 소모적 대결을 지양(止揚)하고 생산적 정책 경쟁을 통해 상생(相生) 정치를 구현하고 싶어한다.

새누리당은 지금 원칙과 실리를 모두 잃고 있다. 이제라도 원칙을 따르면 승리한다. 설사 형식에선 지더라도 사실상 승리할 수 있다. 새누리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원칙을 좇아 싸우려는 정정당당한 승부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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