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헌법을 위반하는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래도 되는가."

여야(與野)의 힘겨루기로 총 9명이어야 할 헌법재판관 가운데 한 자리가 공석(公席)인 상황이 8개월째 지속되자 참다못한 헌법재판소가 국회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이강국 헌재 소장은 22일 국회의장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했다. 헌재가 국회에 항의 서한을 보낸 것은 헌재 설립 23년 만에 처음이다.

이 소장은 서한에서 "국회가 헌법재판관을 선출하는 것은 헌법상 권한이자 의무"라며 "국회가 재판관 공석이라는 위헌적 상태의 장기화를 해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재의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여야는 작년 7월 퇴임한 조대현 재판관 후임으로 민주통합당이 추천한 조용환 후보자를 선출하는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조 후보자 선출안은 지난 9일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그동안 공식 입장 표명을 자제하던 헌재가 항의서한까지 보내기로 한 데는 조 후보자와 관련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의 발언과 새누리당의 무관심에 가까운 대응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고 한다.

공석인 재판관 1명의 추천권을 가진 한 대표는 지난 13일 "19대 국회에서 조 후보자를 다시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19대 국회는 올 6월 소집되기 때문에 한 대표 말대로라면 앞으로도 4개월 이상 재판관 공석이 더 지속된다.

헌법재판소가 22일 국회에“헌재 재판관 선출 의무를 이행하라”며 항의 서한을 보냈다.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회의실에서 육정수 공보관이 서한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강국 소장을 비롯한 재판관 8명은 긴급 간담회를 가졌고, 재판관의 업무를 보좌하는 연구관들도 모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헌재 고위관계자는 "방통위원장이나 특임장관 인사청문회는 하기로 해놓고, 헌법기관인 헌재재판관 선출을 4개월 이상 나 몰라라 하겠다는 게 과연 제대로 된 국회인가"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헌재는 국회가 재판관을 선출하지 않는 것이 위헌(違憲)인지를 따질 위헌심판에 최근 본격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오승철 변호사가 "재판관 9명에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헌법소원을 낸 데 따른 것이다. 헌재는 이 사건을 전원재판부에 배당하고 지난 17일 국회에서 답변서도 제출받았다.

헌법은 111조에서 "헌법재판소는 법관 자격을 가진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하고, 9명 중 3명은 국회가 선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관 선출'은 헌재가 22일 서한에서 밝힌 대로 국회의 권한이자 의무다. 법조계에선 국회의 행위로 인해 실제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됐느냐가 이번 사건의 중요한 쟁점이 될 것으로 관측한다.

법조계 일각에선 재판관 공석으로 인해 '기본권 보호 기관'인 헌재의 업무에 차질이 생긴 게 분명한 이상 위헌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고 관측한다. 헌재 고위 관계자는 "재판관 공석사태 이후 위헌판단의 경계 선상에 있는 민감한 사건 2~3건의 결정이 연기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국회는 답변서에서 "국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재판관 선출을 위해 노력해 왔다"며 위헌이 아니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