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역협회는 지난 17일 사공일 회장 후임으로 한덕수 주미대사를 추대했다. 말이 추대이지 사실상 이명박 대통령의 낙점(落點)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한 대사가 돌연 사표를 낸 지 하루 만에 후임 무역협회장으로 추대된 것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무역협회 회장단은 "FTA를 확대할 최적임자"라며 만장일치로 한 대사를 추대했지만, 거수기 역할만 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무역협회 측은 그런 사실을 부인했지만, 신임 회장을 미리 낙점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치권에선 그전부터 이번 무역협회장 선임 과정의 정치적 내막을 둘러싼 얘기들이 회자되고 있었다. 언론도 그런 조짐을 미리 전했다. '청와대, 후임 인선 고심중' '청와대와 정부, ○○○씨를 내정' 같은 기사가 잇달아 등장했다. 무역협회는 회원사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민간경제단체다. 청와대나 정부가 회장 인선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보도가 나온 건 정부가 회장 후보를 내정하면 무역협회 회장단이 그대로 추대하는 게 관례였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역협회장의 '낙하산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무역협회는 무역업계의 권익을 보호하는 게 주된 업무인데도 그동안 고위 관료 출신이 거의 회장을 독점해왔다. 1946년 창립 이후 역대 15명의 회장 가운데 무역업계 출신은 박용학 대농그룹 회장, 구평회 전 LG상사 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등 3명뿐이었다. 경제 5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한국경영자총협회·중소기업중앙회·무역협회 중 유독 무역협회만 이런 관행이 반복돼 왔다. 지식경제부나 무역협회 인사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대기업 이익을,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 이익을 대변하지만 무역협회는 해외시장 개척이나 수출 진흥 같은 공공적인 업무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중량감 있는 고위 관료 출신이 그런 일을 더 잘할 수도 있다. 무역협회 운영 과정에서 대기업 입김에 덜 휘둘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꼭 고위 관료 출신만 잘할 수 있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협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회원사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또 무역 진흥을 위한 기관이라면 코트라(KOTRA)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회원들이 능력 있는 고위 관료 출신을 자발적으로 추대하는 것과 정부가 낙점한 인사를 마지못해 추대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점이다.
최근 일부 무역업계 인사들은 전국무역인연합이란 단체를 만들어 '무역협회장 낙하산 인사 반대 운동'을 펴고 있다. 이 단체의 김영일 상임대표는 "경제 5단체 중 무역협회만 회비 한 푼 내지 않는 정부의 낙하산 인사에 휘둘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와 무역협회는 "그 단체는 친목동호회일 뿐 대표성이 전혀 없다"며 이들의 주장에 귀를 닫고 있다. 청와대나 정부는 무역협회를 정부 산하기관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비판에 이젠 귀를 열어야 한다. 무역협회의 주인은 수출 일선에서 뛰고 있는 무역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