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제 왼손으로 주먹을 쥘 수 없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휘갈긴 총탄이 손가락으로 가는 신경을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그에겐 아직 오른손 주먹이 남아있다. 그는“제주 해군기지 반대하는 사람들 콱 쥐어박고 싶다”고 말했다. 석해균 선장이 진해항의 충무공 이순신함 갑판에서‘자랑스러운’왼주먹을 들어 보였다

장복산(長福山·해발 582m)은 진해(鎭海)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백두대간이 바다를 만나 마지막 용틀임한 그 품에서 삼한시대 장복이 무예를 닦았고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지켰으며 손원일 제독이 해군의 기틀을 세웠다. 천혜의 군항(軍港)이 내려다보이는 그 산 시루봉 줄기에 '충무공 이순신 리더십센터'가 있다.

2층 사무실에 낯익은 사내가 앉아있었다. 그는 왼손을 못 썼다. 신경이 끊어졌다고 했다. 몸은 오른손에 든 지팡이가 받치고 있었다. 셔츠를 벗기자 가뭄에 거북등짝처럼 갈라진 밭고랑이 떠올랐다. 격진(激震)이 지나간 듯한 배는 거친 수술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에게 비극이 닥친 건 작년 1월 21일이었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배와 팔과 다리에 6발의 총탄을 쑤셔 박았다. 해군 청해부대의 '아덴만 여명작전'이 시작된 후였다. 작전이 끝난 한참 뒤까지 그는 삼호주얼리호에 있었다. 옮길 방법이 마땅치않았던 것이다.

280일간의 투병 끝에 목숨은 건졌으나 석해균(石海均·59)은 더 이상 조타기를 잡을 수 없었다. 남극의 파도 부서지는 마젤란해협과의 작별이 그때 생각났다. 인도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희망봉을 수없이 돌던 기억도 가물댔다. 그런 그가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선장(船長)이라는 타이틀은 뗐다. 대신 이달 1일 새 직장을 구했다. '해군 충무공수련원 정신교육교관 군무원 3급'이 지금 그에게 달린 직함이다. 1975년 8월, 5년4개월간의 복무를 끝내고 하사로 전역한 지 37년 만에 부이사관급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고향 바다, 내 삶의 터전 진해

기차 안에서 '팔자(八字)'라는 단어가 계속 생각났다. 동대구까지 내달리던 KTX는 진영 근처부터 속도가 더뎌졌다. 서울이 영하 10도가 넘는 강추위로 얼어붙던 날, 진해에는 이른 봄이 손짓하고 있었다. 역을 나서자 그가 있다는 건물이 보였다.

―해군에서 연락이 온 게 언젭니까.

"병원에 있던 작년 6월쯤이었는데 그때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생각했던 건 해양수산부를 포함해 여기저기서 제의가 왔던 작년 9월부터였어요."

―왜 해군을 택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군(軍) 쪽이 체질에 맞는다 싶더군요. 제가 원래 필드(Field) 스타일이거든요. 1월 18일 계룡대에서 면접을 봤죠. 그렇지만 아직은 '선장'이라고 불리는 게 더 편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장병들의 정신력 강화가 주 임무입니다. 외부 강연도 할 예정이고요. 이달 말까지는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해군 출신이긴 하지만 떠난 지 오래됐으니 '해군화(化)'가 필요하겠죠."

―1975년 8월 부사관으로 전역했지요.

"부사관 14기로 5년4개월 복무하고 만기제대했는데 줄곧 진해에 있었습니다. 아내와도 상의했는데 해군에 가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집사람은 반가울 거예요. 고향이 진해이니. 부산에 살다 지금 옮겨와 같이 지내고 있어요."

―그때는 왜 해군에 지원했습니까.

"육사를 지원하려 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았어요. 대학 갈 형편은 못됐고요. 군복무나 마치자는 생각에 병무청에 가봤어요. 처음엔 해병대에 입대하려 했는데 지원이 다 끝났더군요. 해군은 남아있었고요. 입대해 8호함, 602함, 525함과 기름운반선을 탔고 보급업무를 주로 했지요."

―수영을 잘했습니까.

"고향이 밀양인데 근처에 큰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제대로 배우진 못했지만 물에 가라앉지 않을 정도는 됐지요."

―제대 후 경찰(순경)로 일하기도 했죠.

"석 달쯤 했는데 너무 박봉(薄俸)이어서 그만뒀습니다. 제가 3남2녀의 맏이인데 부모님이 자그맣게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비를 보태야 할 입장이었거든요. 1977년 4월 부산에서 '럭키3호'라는 유조선을 처음 타게 된 겁니다, 갑판원으로요. 해군을 제대하면 선원수첩을 받는데 그게 있으면 되거든요."

―갑판원 월급이 경찰보다 얼마나 많습니까.

"경찰 월급이 한 달에 5~6만원일 때 10만원쯤이었으니 두배 정도 됐지요."

―사주에 '바다'가 들어있습니까. 이름에도 바다 해(海)자가 있는데.

"사주를 본 적은 없어요. 언젠가 인도네시아에 기항했을 때 중국인 선주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사주책을 보길래 재미삼아 생년월일을 말하니 '당신은 바다를 떠날 수 없다'고 한 적은 있어요. 제겐 바다가 더 편하죠. 육지에 오면 버스만 타도 울렁거리니까요."

―외항(外航)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1979년 일본배를 처음 타면서부터입니다. 전 일반 선박이 아닌 특수선을 주로 탔어요. 유조선이나 '케미칼'이라고 하는 화학물질 운반선을요. 그걸 몰면 회사에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거든요. 제가 선장이 된 건 1995년입니다. 다 더해보니 경력이 벌써 22년 되네요, 해군 있을 때 배탄 건 제외해도요."

석해균이 상의셔츠를 벗자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총질당한 상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상한 느낌을 아내는 받았더군요."

그는 일년에 평균 지구를 두 바퀴 돌았다고 한다. 석해균은 아름다운 바다와 무서운 바다를 다 경험했다. 오대양을 휘젓는 태풍도, 허리케인도, 사이클론도 그는 겁내지 않았다. 2010년 12월 24일까지 그는 불운(不運)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마도로스였다.

―지금까지 다닌 바다가 다 기억납니까.

“험하기론 마젤란해협이 제일이고, 한 7~8번 돌았지요. 대서양에선 스페인과 프랑스 근처의 비스케이만과 노르웨이 쪽이 거칠고요. 태평양에선 필리핀에서 대만 사이가 위험합니다. 아름답기론 옛 유고 쪽 바다인데 척 보면 숲이며 풍경부터 다릅니다. 정말 살아보고 싶은 곳이죠.”

―한번 출항하면 몇달씩 걸리기도 하지요.

“제일 오래 타본 건 37개월 연속 승선한 건데 그때는 아내와 배에서 6개월 동안 함께 지낸 적이 있어요. 예전엔 배에 여자가 타면 재수없다는 속설이 있었지만 선장과 기관장은 원하면 아내를 동승시켜줍니다.”

―예전에 배 타고 떠난 남편이 고생해 보낸 돈을 육지 아내가 흥청망청 쓰거나 바람피워 물의를 빚었다는 보도가 꽤 있었습니다.

“제가 데리고 있던 선원 중에도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있었어요. 제 아내는 그런 적 없지만요. 꽤 정확한 사람이거든요.”

―그래도 육지에서 정착하고픈 마음이 있었을 텐데요.

“있었죠. 음식점도 해보고 싱크대 판매업도 했는데 다 날리고 말았어요. 하필이면 그때가 IMF 직전이었거든요. 십억쯤 날리고 다시 배로 돌아갔죠. ‘이게 내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말리아 해적을 만나기 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은 없었습니까.

“예전엔 해적이란 게 없었어요. 해적이 등장한 건 2003~04년 정도부터입니다. 인도네시아 쪽 바다에서 좀도둑을 만난 적은 있었습니다. 새벽 2시쯤에 시커먼 녀석들 5명이 정글칼을 들고 기관장 방을 덮친 뒤 기관장을 앞세워 내 방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때는 대비책이 있었어요. 승선하기 전에 100달러를 1달러짜리로 바꿔 그 중 60장을 봉투에 ‘접대용’으로 넣어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내주니 그 녀석들이 확인도 안 하고 좋다고 웃으면서 내리더군요. ‘바이바이’ 인사까지 하면서. 나중에 후회했겠지요. 겨우 60달러 벌려고 그 고생을 했으니, 허허.”

―그럼 그 사고를 당하기 전 아무런 ‘징조’도 못 느꼈다는 겁니까.

“이상한 일이 있긴 했지요. 원래 전 ‘삼호프리덤’을 몰았거든요. 그 배와의 인연도 돌이켜보면 묘하긴 해요. 삼호프리덤은 건조한 지 5~6개월밖에 안 된 새 배였는데 전(前) 선장이 미숙했는지 배 밑바닥을 찢어놓은 겁니다. 항해할 때 계산을 잘못한 거였어요. 그때 전 다른 회사에 있었는데 삼호의 인사부장이 ‘선장님이 꼭 좀 와주셔야겠다’고 사정을 했어요. 그래서 그 배를 맡아 목포로 몰고 와 수리를 맡겼는데 견적이 50일 나왔어요.”

―그때 푹 쉬었으면 해적을 안 만날 수도 있었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그 인사부장이 또 ‘삼호주얼리’를 몰아달라는 겁니다. 당시 삼호 주얼리 선장이 선원들 컨트롤을 못한다면서. 내가 마음이 약해 남의 부탁을 잘 거절 못하는데 아내가 그때만큼은 ‘안 가면 안 되느냐’고 하더군요.”

고향과 같았던 배에 다시 올랐을 때 석해균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그는 몸 뒤에서 펄럭이는 해군 깃발처럼 금세 활력을 되찾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역시 여자들은 육감이 발달했다더니.

“인도 뭄바이에서 삼호주얼리를 인수했습니다. 배에 척 올라보니 역시 개판이더군요. 한국인 8명, 미얀마인이 13명이었는데 그중 미얀마 녀석들 3명이 술에 취해 대들고 난리를 피우는 거였어요. 일본말로 ‘쿠세’라는 건데, 전 그런 걸 용서 못하거든요. 회사에다 대고 ‘자르라’고 했더니 ‘사람 구하기 힘들다’며 안 된대요. 그래서 인원보충을 받지 못하더라도 자르라고 했지요. 제 뜻이 받아들여져 인도의 다른 항구에 녀석들을 내려놓고 이란에 메탄올을 실으러 간 겁니다.”

―결과적으로 깽판 치던 미얀마인 3명만 ‘땡’잡은 격입니다.

“하하하! 맞아요. 이란에서 선적한 메탄올을 중국에 내려놓으려고 떠난 길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이 덮친 거지요. 아침 7시 45분에. 그곳이 평소에도 연무(煙霧)가 자욱한 곳이어서 감시에 취약한 지역입니다. 처음엔 5명이 올라오더니 나중에 8명이 합류하더군요. 급히 선미(船尾) 쪽 대피소로 숨었는데 3시간 반 만에 발각됐지요.”

―그런데 청해부대가 구출작전을 펼 때까지 왜 선장만 맞은 겁니까.

“나만 반항했거든요. 일부러 엔진 고장을 내게 했는데 소말리아 해적들이 본부와 전화해보더니 내가 한 소행인 걸 알더라고요. 그쪽에 소말리아인이 아닌 유럽인 선장 출신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 해적들에게 전화로 상황 설명을 듣더니 딱 ‘그건 선장이 한 짓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무지하게 두들겨 맞았지요.”

"제주해군기지 건설해야 합니다"

구타당하면서도 석해균은 방해공작을 폈다. 배가 소말리아로 끌려가지 않게 저항한 것이다. 그는 선원들에게 배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배전반을 이용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도 내렸다. 막판엔 청수(淸水)를 버리라고 했다. 보일러 가동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선원들이 말을 안 듣던가요.

“이미 겁에 질려 있었거든요. 오히려 제게 ‘선장님, 조용히 소말리아로 갑시다’라고 하더군요.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전 죽었을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지금 교도소에 있는 아라이는 저한테 총을 쐈을 뿐인데 더 지독한 놈이 있었어요. 청해부대에게 사살당한 키 작은 녀석! 얼마나 지독한지 절 칼로 죽이려 했는데 두목이 제지하자 흥분한 나머지 자기 엄지손가락을 자르더군요. 그리곤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넌 소말리아 가면 내가 직접 죽이겠다’고 악을 썼어요.”

―정말 악질 해적입니다.

“왜냐하면 억류 사흘째부터 전세가 역전됐거든요. 해적들이 오히려 제게 애원하는 상황이었어요. 돈을 달라기에 오히려 제가 큰소리를 쳤어요. ‘구명보트 줄 테니 조용히 사라지라’고. 그러니 열이 받았겠지요.”

―석 선장은 원래 겁이 없습니까.

“겁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원래 선장이란, 리더란 배에 위험이 닥칠 때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자립니다. 그게 없으면 선장을 해선 안 되지요.”

―얼마 전에 이탈리아의 한 유람선 선장은 승객 내버리고 혼자 도망쳤잖아요.

“저도 뉴스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 거 정말 이상한 친구더구만. 어떻게 그런 자가 선장을 했을까?”

―청해부대의 공격이 시작된 직후 총을 맞았는데 당시 느낌이 어떻던가요.

“뭐라 설명하기 그렇고 문 기자도 맞아보면 알아요. 맞아보면…. 따끔하다가 정신을 잃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 정신을 잃고 있으면 죽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라도 의식을 놓으면 안 되지요.”

―일각에선 ‘아덴만 여명작전’이 무리한 작전이었다고 합니다.

“그거 정말 한심한 소리예요. 전 공격이 시작됐을 때 쾌감을 느꼈어요. 결과적으로 우리측 사상자가 한 명도 안 나오기도 했지만 위험부담 없이 FM대로 하는 작전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만일 죽었어도 전 원망 안 했을 겁니다. 작전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거든요. 우리 해군의 위상을 높이고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 시킨 건데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실 제가 요즘 열받는게 있어요. 바로 제주해군기지 문젭니다.”

―해군기지요?

“앞서 얘기했듯 제가 처음 해적 습격을 받았을 때 3시간 넘게 대피해 있었는데 만일 근처에 군항이 있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 아니겠어요. 제주해군기지는 너무도 필요한 겁니다. 필요가 아니라 없으면 안 돼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내가 선원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물동량의 99.8%가 제주 남방해역을 지나는데 그곳이 막히면 나라 전체가 고사(枯死)하는데. 게다가 이어도 주변에서 분쟁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제주도에 기지가 없으면 어디서 떠납니까? 정말 분쟁이 생기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반대하는 사람들은 왜 반대한다고 봅니까.

“종북세력이 있는지 없는지 전 모르겠어요.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 아닌가요? 어떨 때는 ‘저 사람들이 돌았나’ 하는 생각도 해요. 제가 아직 몸이 결리고 움직이면 아프지만 나아지면 제주 현장도 가보고 전국을 돌며 열변을 토하고 싶어요. ‘제주해군기지는 반드시 건설해야한다’고요.”

"한 대 쥐어박고 싶어요"

어느덧 석해균은 선장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건 역사의 진리잖아요. 영국이 대표적인 예 아닙니까? 나중에 무슨 일 터지면 그때 가서 ‘왜 그때 대비 못했느냐’고 할 사람들입니다. (반대하는) 그 사람들이.”

―석 선장은 그렇게 말하지만 올해 예산도 삭감됐고 얼마 뒤 중지 여부를 결정한다면서요. 정치인들도 선거 앞두고 눈치만 보고.

“참 답답합니다. 항구가 들어서면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고 그러면 수익이 창출되는 거 아닌가요. 만일 중지되면 국가적으로 큰 손해가 될 겁니다. 너무 안타까워요.”

일반계약 군무원(3호)이 석해균 선장의 현재 직함이다.

―군항을 기피시설처럼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군항이라고 딱 규정짓는 것 자체가 문젭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일반항구, 군항으로 구분짓는 나라가 있습니까? 사우디도 그렇고요. 그거 차별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긴데 원래 군항이 더 깨끗합니다. 게다가 제주항은 군인만 쓰는 게 아닙니다. 일반 상선도 함께 사용하는 거예요. 그걸 군항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니….”

―군항이 더 깨끗하다뇨?

“여기 진해항 못 보셨어요? 지저분하다고 소문난 중국 해남도(海南島), 그래 거기도 군항은 정말 깨끗해요. 호주 시드니만 해도 세계 3대 미항으로 평가받잖아요. 거기도 한쪽은 해군이 쓰거든요. 인도 뭄바이도 상선(商船) 드나드는 곳과 군함 드나드는 곳이 붙어 있어요. 부두만 다르고. 거기도 군함부두가 훨씬 더 깨끗합니다. 미국에서 제일 큰 노포크항만 해도 그렇지요.”

―사정이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남대문 안 본 사람이 더 목청 높인다고 꼭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바다에 한번 나가보지도 않은 이들이 그렇게 헛소리들을 늘어놓는데 생각 같아선 한대 콱 쥐어박고 싶습니다.”

―원래 해군기지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겁니까, 군무원이 된 뒤 변한 겁니까.

“바다로 떠돌 땐 별생각이 없었지요. 하지만 누워 있으면서 그 얘길 듣다 보니 화가 나더군요. 거길 못 지키면 우리나라는 끝나는데, 제가 평생 그 길로 다녔는데 왜 반대들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해양을 무시하는 나라의 운명을 다 알고 있잖아요. 하긴 선장들이 제 대접 못 받는 나라 중에 우리도 포함되지만.”

―기회가 있으면 끝장논쟁 같은데 한번 나가시지요.

“나갈 겁니다. 제가 나이가 있어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주기지는 꼭 해야 합니다. 제가 나설 거예요.”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왜 ‘낙지가 제일 먹고 싶다’고 했습니까? 저도 낙지광(狂)이지만.

“원래 광어와 도다리를 좋아했는데 저도 무의식중에 왜 그런 소릴 했는지 나중에 생각해봤어요. 아마 필사적이었던 게 아닐까, 낙지가 다리를 잘라놓아도 끝까지 꿈틀대며 발버둥치잖아요. 그때 제 심정이 그랬을 겁니다.”

―전국에서 낙지가 답지했겠습니다.

“많이 보내주셨지요. 제가 무안 갯벌낙지 홍보대사가 된 것도 그 말을 한 직후입니다. 무안에서 많이 보내주셨어요, 아이스박스에 싸서. 그거 계란 풀고 소금 넣은 참기름에 찍어 먹으면 끝내주지요.”

―병원비가 꽤 나왔는데 갚느냐 마느냐 논란도 있었습니다.

“3억7000만원이 나왔는데 내느니 못 내느니 할 때도 병원 측은 제게 ‘선장님껜 청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아주대병원 홍보대사를 시켜주며 평생 무료진료권까지 줬는걸요.”

―수입이 작년 1월부터 사실상 없었죠.

“회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후 청산절차를 밟고 있고 그래서 보험 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아요. 봉급 받아본 건 작년 3월이 마지막이고 계속 체불(滯拂)됐지요.”

―구사일생 살아나니 생계가 걱정입니다. 모아놓은 재산은.

"부산에 50평짜리 집이 있어 세를 놨는데 용돈 정도밖에는 안 돼요."
대화가 끝난 후 우리는 진해항에 정박 중인 충무공 이순신함에 올랐다. 석해균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언제나 탈 수 있었던 배를 이제 탈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3층 위 함교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쓸쓸했다.
바다의 사나이는 해풍을 맞으며 여러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와 헤어져 반대편 횟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보름달이 장복산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충무공이 지키고 손원일이 키운 해군을 이제는 석해균이 지켜줄 것이란 생각에 포만감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