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9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무대에 스티브 잡스애플의 신제품 '아이폰'을 들고 등장했다. 테 없는 안경을 쓴 그는 검은 터틀넥 티셔츠,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뉴발란스(New Balance) 운동화 992모델을 신었다.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결같이 고집한 차림 그대로였다. '뉴발란스 992'를 즐겨 신던 그에 대해 비즈니스 위크는 "잡스의 신발(뉴발란스)은 잡스라는 거대한 퍼즐을 맞추는 한 조각"이라고 표현했다.

아이폰이 세상에 공개된 지 5년이 지난 지난달 27일 오후 7시 바로 그 맥월드에서 진원석(44) 감독의 13분짜리 단편 영화 '992'가 상영됐다. 잡스를 상징하는 운동화 '뉴발란스 992'에서 따온 제목이다. 미국 인터내셔널 데이터 그룹(IDG)이 주관하는 맥월드는 애플관련 제품을 소개하는 세계최대 규모의 전시회. 애플은 2009년까지 신제품 발표를 겸해 이 행사에 참가했으며 잡스는 기조연설을 통해 아이폰 같은 애플 제품을 소개했다.

잡스 사망 후 처음 열린 올해의 맥월드는 네 명의 영화 감독들에게 아이폰4S로 촬영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의뢰했고, 진 감독이 한국 감독으로 유일하게 초청됐다. 그는 "맥월드 측이 주제를 정해주진 않았지만 잡스가 5년 전 아이폰을 들고 섰던 무대에서 그의 유작인 아이폰4S로 만든 영화를 상영한다면 당연히 그에게 헌정하는 영화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윤지, 김의성과 신인배우 대니 박이 출연하는 영화 '992'는 진 감독 본인의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틀 만에 촬영했다. 지난해 할로윈 파티 때 잡스 분장을 하기로 한 그는 '뉴발란스 992'를 구하러 운동화 가게 10여 군데를 돌아다니다 결국 실패했다. 영화는 할로윈 파티에 초대받은 잡스의 팬이 한국 뉴발란스 매장에서 팔지 않는 모델 '992'를 찾으러 나선 과정을 코믹하게 그렸다. '뉴발란스 992'를 가진 신발가게 주인과 잡스의 팬이 주고받는 대화에선 잡스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진 감독은 "짧은 영화인데도 관객들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경쟁사를 비꼬는 장면에선 박장대소가 터졌다. 잡스도 분명 좋아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13일 오후 서울 강남에서 진원석 감독이 '992'촬영에 사용한 아이폰4S를 들어보이고 있다.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잡기 수월하도록 거치대를 끼우고, 카메라 렌즈에는 DSLR렌즈를 연결했다.

진 감독은 연세대 불문과를 다니던 중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 영화과로 유학을 떠났다. 김혜수, 금성무, 미라 소르비노가 출연한 '투 타이어드 투 다이'(1998)로 데뷔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2008년 영화 작업 때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아이폰을 사용하게 된 진 감독은 2010년 출시된 아이폰4로 가수 양진석씨의 '가로수길'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10만여명이 곰TV와 유튜브에 올라온 뮤직비디오를 봤고, ABC뉴스에도 소개가 됐다. 이게 맥월드가 그에게 영화 연출을 의뢰한 계기가 됐다.

그는 "'992'를 만드는 덴 아이폰4S뿐만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 덕을 톡톡히 봤다"고 했다. 영화 제작비 (1000만원대) 중 500만원은 소셜펀딩(소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소액의 후원을 받는 것)을 통해 모았고 파티에 등장하는 엑스트라 20명도 페이스북을 통해서 불러모았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뉴발란스 992' 운동화는 뉴발란스 코리아로부터 중고 제품으로 협찬받았다.

진 감독은 "뮤지션들이 비틀즈를 존경하듯 나는 잡스를 존경한다. 그는 IT업계에 있는 사람이지만 인문학과 예술을 존중했다"고 했다. "잡스는 예술과 기술의 접합점을 만들어냈어요. 게다가 입양아에 대학 중퇴 출신으로 세상을 바꿔놓은 그의 인생에서도 사람들은 영감을 얻어요. 이제 아이폰으로 누구나 영화를 만들게 됐잖아요."

그에 따르면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은 많은 이들을 자유롭게 해줬다. 영화를 적은 돈으로 찍고 극장이 아닌 곳에서 개봉할 수 있는 대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992'를 24일 0시(한국 시각)에 곰TV, 유튜브, Vimeo 등에 공개할 예정이다. "왜 2월 24일 이냐고요? 그날이 바로 스티브 잡스의 생일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