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인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1962년 2월 3일 경남 울산군 대현면 고사리,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민둥산에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삽을 뜬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자리였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울산은 연간 수출이 1000억달러를 돌파(2011년)했고, 우리나라는 지난해 1조달러의 무역고를 올렸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 삽, 울산

1961년 5·16 이후 들어선 '혁명정부'는 1962년 1월 13일 대국민 발표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했다.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빨리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던 박정희 의장과 군사정부 세력들은 울산공업센터 건설을 상징으로 삼았다.

당시 울산공업센터 입안·건설을 주도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84)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은 현지 조사 후 보름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그해 1월 초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상공부 직원들이 울산을 방문해 현장조사를 벌였고, 보고서를 받은 최고회의는 '보름 안에 기공식을 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달희 울산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1961년 기업인들이 외자(外資) 유치를 위해 미국과 유럽에 다녀왔는데, 당시 미국 측에서 '공업특구를 지정하고 법정요건을 갖추면 시찰해 보고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었다"며 "빨리 자본을 들여오기 위해 서둘렀던 이유가 크다"고 말했다. 때문에 땅이 꽁꽁 얼어 삽질도 어려운 2월 초에 부랴부랴 기공식이 열렸다는 것이다.

◇울산이 낙점된 이유

우리나라의 첫 공업지구가 울산으로 결정된 것은 1955년 울산에 첫 공장인 '삼양사'를 세운 김연수 회장, 남궁련 당시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과 김용태 당시 중앙정보부 경제고문(후에 공화당 원내총무)의 합작품이었다고 한다.

김 회장이 설탕 사업(삼양사)을 하기 위해 공장부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울산이 공업용수 조달이 쉽고 항만이 가까워 입지조건이 좋다는 경험적 확인을 했고, 남궁련 부회장은 일본제국주의가 작성한 울산에 관한 개발 보고서를 입수해 갖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공업지구를 짓는다면 울산으로 가야 한다'는 일종의 공감대가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의 친구'였던 김용태 고문이 이 같은 의견을 수렴해 박 의장에게 '사전승인'을 받았다.

이후 1962년 1월 1일 박 의장이 직접 울산을 방문해 현장 시찰을 했고, 이튿날 부산 해운대에서 이병철 회장과 남궁련 부회장, 이정림·정재호·김주인 등의 기업인들과 만나 울산에 공업센터를 세우기로 확정했다. 오원철 전 수석은 "울산은 날씨, 급수, 항만 등의 입지조건이 뛰어났고, 전쟁이 터져도 안전하겠다는 판단이었다"고 했다.

1962년 2월 3일‘울산공업센터’기공식이 열린 경남 울산군 대현면 고사리. 나중에 정유공장이 들어서는 자리에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가운데)이 첫 삽을 떴다.

◇윤보선 대통령도 참석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현장에는 윤보선 당시 대통령도 참석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4~5장의 사진은 모두 박정희 의장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달희 교수는 "당시 신문에도 윤 대통령이 참석했다는 언급조차 안 나온다"며 "국가기록원에 '윤보선 대통령도 참석했다'는 기록 한 줄뿐"이라고 했다.

3일 울산시청에서는 지식경제부가 주최하고 울산시, 한국산업단지공단, 울산상공회의소가 공동주관한 '울산공업센터 지정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오원철 전 수석이 울산공업단지 지정에 기여한 공으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박맹우 울산시장은 "울산은 대한민국을 근대화와 산업강국으로 이끈 주역"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울산이 달성한 1000억달러 수출기록은 웬만한 국가의 수출규모와 맞먹는다. 이란, 덴마크보다 많고 터키와 비슷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