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만원? 에이, 그럴 리 없어요. 몇 백밖에 안 될 텐데…."
지난 12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신용회복위원회(이하 신복위) 명동지부 상담센터. 상담을 하러 찾아온 황모(29)씨의 채무 이력을 컴퓨터로 조회한 신복위 이창인(43) 조사역이 "빚이 10년간 연체돼 2000만원으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빚 숫자가 적힌 모니터를 확인한 황씨 얼굴이 단박에 잿빛으로 변했다.
황씨는 2003년 카드론으로 500만원을 대출받아 유흥비로 썼다. "취직해 갚으면 된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동안 빚은 원금의 4배로 불어났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해오다 서른 문턱에 '4대 보험이 되는' 회사에 들어가려고 원서를 냈을 때야 빚 때문에 취직을 못 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에서 신용불량자는 사절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황씨는 "빚이 취업까지 막을 줄 몰랐다"고 머리를 쥐어 감쌌다.
연소득 2000만원 미만 저소득층의 가계대출이 전체의 12%에 달한다. 규모도 문제지만, 빚 증가 속도가 더 문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0년 초부터 2011년 6월까지 1년 반 동안 전체 가계대출 증가액 중 저소득층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37%에 이른다. 담보도 없고 신용등급도 낮은 저소득계층은 제2금융권의 표적이다. 같은 기간 비(非)은행권 가계 대출 증가율(18%)은 은행권(8.5%)을 두 배 이상 앞질렀다.
기자는 이날 신복위에서 이창인 조사역의 일일 보조상담사 자격으로 채무 조정 신청자들을 만났다.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신복위를 찾은 사람들에게서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빚 불감증'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유형 1―무관심
오전 9시 660㎡(200평) 규모의 대기실에 10명의 채무 조정 신청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퉁퉁 부어 있던 주부 안모(62)씨는 말문을 열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아냈다. 그녀는 지난 2006년 당시 25살이던 아들에게 자신 명의로 신용카드 2장을 만들어 줬다. 아들이 "한 달 용돈으로 10만~20만원만 쓰겠다"고 해서 만들어 줬는데, 아들은 수십 차례 카드 대출을 썼고, 최근 카드사 2곳에서 1280만원의 빚을 졌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안씨는 "아들이 뭐하고 사는지 신경 못 쓴 내가 죄인"이라며 주먹으로 무릎을 퍽퍽 쳤다.
식당에서 일하는 안씨의 월급은 70만원, 아파트 경비원인 남편까지 합쳐 한 달에 190만원을 번다. 생활비를 빼면 한 달 고작 20만원 남을 뿐인데도 아들이 들고 간 신용카드 사용액은 몰랐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자기 신용카드를 다른 사람이 쓰도록 하고, 어떻게 쓰이는지도 몰랐다는 건 그만큼 빚에 둔감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형 2―돌려막기
경기도의 한 대형 리조트 영업직으로 일하는 이모(51)씨의 팔목에 감긴 샛노란 금팔찌가 무거워 보였다. 몇 년 전 그는 3억원짜리 아파트를 팔아 건축 자재업체를 차렸지만, 부동산 경기가 악화돼 문을 닫았다. 그는 부족한 생계비를 충당하려 재작년 5월 카드론 300만원을 시작으로 1년 반 동안 11곳의 금융회사에서 수십 차례 돈을 빌려 빚을 돌려막았다.
상담 내내 그는 "차를 팔 걸, 차를 팔았어야 해"라고 중얼거렸다. "벤츠차 팔아서 생계비에 보태지 그랬냐"고 묻자 그는 대뜸 화를 냈다. "자존심 상하잖아요. 빚쟁이가 차도 없어 봐. 그게 무슨 꼴이냐고." 연체이자만 850만원으로 급증했고, 돌려막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3200여만원의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금융사들은 안씨의 돌려막기를 도왔다. 월소득 110만원 중 70만원을 월세로 내는 그에게 금융사들은 빚을 계속 내 줬다. 한 달 정도 이자를 연체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도 금융회사는 돈을 빌려 줬다. 신복위를 찾은 사람 중 상당수가 저축은행, 캐피탈, 카드사 등 평균 5~6개 금융기관에 빚을 지고 있다.
◇유형 3―빚보증
오후 3시 채무 조정 신청자들이 아침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상담센터 곳곳에서 "빚 갚아 주기 싫다"는 고성이 들렸다. 대부분 지인이나 가족을 지나치게 믿다가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이라고 이 조사역이 설명해 줬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14만원짜리 단칸방에 사는 이모(35)씨는 동업한 친구가 사기치고 도망갔다면서 상담 내내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친한 형이었다니까요. 빚진 게 다 내 실수만은 아니잖아요?" 7년 전에 함께 빵집을 냈다가 판매 부진으로 올해 초 사업을 접었는데, 남은 사업자금 수천만원을 동업자가 들고 도망갔다고 했다. 카드론으로 생계비를 때우던 그가 신복위를 찾는 데 1년이 채 안 걸렸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중·고교생 때부터 '환율'이나 '외환' 같은 거시 경제교육은 조금 줄이고 실생활에 맞닿아 있는 '신용등급' '빚' '연체이자' 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