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의 농가 부채 통계에 눈길 끄는 대목이 있었다. 축산 농가 부채가 2008년 한 해 동안 두 배나 불어난 것이다. 2007년 말 가구당 5270만원이던 금융빚이 2008년 말엔 1억760만원이 됐다. 1년 새 5500만원 늘어난 셈인데, 웬만한 중산층의 1년 벌이와 맞먹는 금액이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2008년은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광우병 소동이 벌어졌던 해다. 농가가 아우성치자 정부는 농심(農心)을 달래려고 지원 대책을 내놓았다. 소·돼지를 키우는 농가에 연 1% 이자의 사료 구매자금을 1년간 빌려준다는 등의 조치였다. 금리가 공짜나 마찬가지인 이 돈을 너도나도 빌렸고 이렇게 나간 대출금이 2조1000억원에 달했다. 그 결과 부채가 1년 새 두 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빚만 불렸던 것이 아니다. 지금의 소값 폭락도 여기서 비롯된 측면이 컸다. 싼 자금을 빌려 소 키우기에 나선 결과, 소 사육두수가 급속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때 키운 송아지가 성우(成牛)가 돼 시장에 나온 것이 작년이다. 요컨대 소값 사태는 정책 실패의 결과이기도 했다. 정부가 돈을 빌려줘 가며 소 키우기를 장려한 것이 소값 폭락의 한 원인이 된 것이다.
2008년 당시 축산 농가를 지원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했다. 미국 쇠고기 때문에 축산업이 망한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지원 방식이 진통제 투여에 그쳤다는 점이었다. 금리 1% 융자는 일시적 마취 효과뿐, 축산 경쟁력을 높여주는 생산적인 지원이 아니었다. 결국 정부가 돈은 돈대로 쓰면서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가 됐다.
당시 축산 농가가 얻은 이익은 적게 잡아도 1000억원대에 달했다. 시중 대출금리가 연 7~8%라고만 쳐도 6%포인트 이상의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출액이 2조1000억원이니 최소한 1000억원 이상의 현금 혜택이 농가에 돌아간 셈이다. 그러나 소득증대 효과는 딱 1년뿐,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1000억원은 어디론가 흔적없이 증발하고 농가 부채만 남았다.
이왕 돈을 쓸 바에야 좀 더 생산적으로 쓸 생각은 왜 못했을까. 1000억원이면 축산 농가가 중간 유통상 없이 소를 출하할 수 있는 공동 물류시설 몇 개는 지을 수 있는 돈이다. 전국 주요 거점에 공동출하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면 소값 폭락도 막을 수 있었다. 우량 수소의 정자 보급 같은 품종 개량에 돈을 썼더라도 농가에는 지속적인 이익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은 눈앞의 현금을 요구했고, 정부와 정치권은 영합했다.
사실 1000억원만의 얘기는 아니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농업 지원엔 100조원이 투입됐다. 그런데도 농업은 여전히 낙후돼 있고, 때만 되면 배추파동·고추파동이 반복되고 있다. 100조원이 도대체 어디 갔는지 당사자인 농민도, 세금 낸 국민도 실감하지 못한다.
농업 문제는 한국산업사(史)의 최대 미스터리다. 영화는 할리우드의 공세를 견뎠고, K팝은 일본 가요를 이겼다. 그러나 농업만큼은 힘들면 손 벌리는 '응석받이' 체질을 벗어나지 못했다. 현금 주어가며 적당히 넘겨온 농정 당국과, 표만 따지는 정치권이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 고통을 호소하는 육우 농가 사정은 보통 딱한 게 아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식 같은 송아지를 굶겨 죽이겠는가. 그렇다고 빚만 늘리고 증발한 1000억원의 재판(再版)이 돼선 곤란하다. 돈을 쓰되, 제대로 쓰자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