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194년 성리학의 대학자 주자(朱子)는 당시 송나라 황제 영종(寧宗)에게 '산릉의장(山陵議狀)'이라는 풍수론(風水論)을 올린다. 선황이 죽은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때까지 좌향(방위)론 때문에 능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에 주자는 '산릉의장'을 통해 풍수의 요체를 설명한다. 주자의 성리학은 조선을 규정지었다. 당연 주자의 '산릉의장'은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에 의해 금과옥조로 여겨지게 된다. 그 핵심은 "형세상 좋은 땅에 조상을 안장하여 자손 번영의 '구원지계(久遠之計)'로 삼으라"는 것이다. 동아시아 봉건왕조에서 풍수가 유행했던 이유이다.

지난 12월 28일 김정일 위원장이 금수산 모란봉 기슭에 안장되었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안장된 곳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살던 집터나 무덤을 보면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염원뿐만 아니라 후손의 길흉화복까지를 예단할 수 있다는 것이 풍수설이다. 길흉화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염원 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무엇을 염원했을까?

첫째, '동국여지승람'은 금수산을 평양의 진산(鎭山)으로 적고 있다. 모란봉은 금수산 제일봉으로 주맥에 해당된다. 이곳에 오르면 평양이 온통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그 앞에 흐르는 대동강으로 인해 명승을 이룬다. 이러한 까닭에 고려 이후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작품을 남겼으며,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한 빼어난 땅이자 평양의 진산 아래 혈처를 정하고 집무처와 음택으로 삼았다는 것은 평양을 수호하는 신이 되겠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후손의 무궁한 번영과 존속을 염원한 터 잡기였다. 진산과 혈처는 자손의 번창을 주관한다고 풍수서는 해석한다. 김일성 주석이 풍수를 알았을까? "평양의 명당 핵심 자리는 바로 인민대학습당터"라는 생전의 김 주석 발언이나, 김 주석 사후 그가 안장된 곳에 대해 평양방송이 "금수산(모란봉)의 생김이 풍수설에서 일등 진혈로 여기는 금거북이 늪에 들어가는 모양인 금구머리형국이다"라고 보도한 점에서 풍수를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점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은 '조선'과 다름없는 봉건왕조임이 분명하다. 주자의 '풍수론'이 그대로 고수되고 있다.

둘째, 금수산에서 북으로 20리를 채 못 가 대성산(구룡산)이란 명산이 있다. 금수산의 좌청룡 지맥에 해당된다. 이곳 대성산에는 '혁명열사릉'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근처에는 대화궁(大花宮) 유적지가 있다. 대화궁은 고려 때의 풍수승(風水僧) 묘청이 서경(평양)천도론을 주창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역사의 중심지였다.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처음 궁궐(안학궁)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고구려, 고려의 무인정신이 깃든 대성산 지맥을 좌청룡으로 삼아 혈처(穴處) 금수산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주창하는 '강성대국'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그러한 좌청룡 대성산 지맥이 금수산 지맥보다 훨씬 짧다는 점이다.

셋째, 금수산 앞에 드넓게 펼쳐지는 벌판을 풍수용어로 '명당'이라고 한다. 그 명당에 평양시가 자리한다. 그런데 금수산에서 바라본 평양시는 '배가 떠나가는 행주(行舟)'형국이다. 평양이 행주형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다. 배에 화물을 가득 싣고 드나들어야 그 땅이 번창한다. 장사나 무역에 맞는 땅이다. 교역을 통해 부국(富國)을 이뤄야 그 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보자. 평양의 진산 아래 혈처를 정해 안장되었다는 것은 자손의 번영을 염원함이다. 좌청룡 대성산 지맥을 중시한 것은 그의 땅의 기운인 무인적 기질로 혈처를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행주형의 땅은 무역을 통해 부국이 되어야 할 속성을 지닌다. 이 세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북한을 운명 지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