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를 엮었던 남곤(南袞)은 한때 "나라를 빛낼 재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런데 '표해록'의 최부는 훨씬 전에 알아차렸다. 사간원에서 정광필과 남곤을 만나서 읊었다. "훗날 사람이 이 시를 가리키며 어루만질 때, 누가 간사하고 누가 충성된 줄을 모르지 않으리라."
이러한 남곤에게 밉보이면 불행한 인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마 첫 희생자는 서얼학자 박경(朴耕)이었으리라. 일찍이 '조의제문'의 김일손조차 시대를 만나지 못한 그의 깊은 경륜을 아쉬워하며 존중했었다. 젊은 조광조·김식 등이 찾아가면, 과거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학풍 쇄신, 서얼허통(庶孼許通), 유능한 종친의 등용 등을 주장하곤 하였다. 반정공신의 전횡에 대한 비판도 날카로웠다. 이러한 박경을 남곤이 반역죄로 고발하여 처형시킨 것이다.
중종 2년(1507) 봄, 이때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조광조 등은 남곤을 파렴치하게 여겼다가 또한 당하였다.
중종 9년(1514) 문과에 급제한 남주(南��)도 질곡이었다. 본관은 고성(固城), 전라도 곡성 출신. 남곤이 동아리 삼고자 소나무 분재를 보여주며 시를 요구하였다.
남주는 대뜸 이랬다.
"화분에 꽂힌 줄기는 약하다만, 천년설 견딜 만큼 자태는 씩씩하네. 구부러진 몸을 누가 펴줄까? 곧추 저 높은 저문 구름을 헤쳐갈 수 있도록."
아무리 세도가 웅장한 듯싶어도 꾸부정하다는 것. 남곤은 발끈했다. 결국 남주는 곡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고향에서 현감의 엉터리 행정을 감사에 알렸다가 무고죄를 입었다. 관할 백성이 수령과 감사를 고소할 수 없다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에 걸린 것. 박상이 방백에게 선처를 부탁하였다. "예로부터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가 이름 있는 자를 표적 삼는다지만, 이리 되면 호남이 더욱 심한 것이 아닙니까?"
조정의 기묘사림까지 변호하였지만, 평안도 의주 유배. 중종 12년(1517) 9월 풀려나서 곡성으로 가지 못하고 장성 삼계면으로 옮겼다. 한참 후 동복현감을 받았지만 또 파직, 남곤을 거스른 대가는 비쌌다.
송나라 주돈이의 '졸부(拙賦)'를 베껴두고 마음을 다졌다.
"꾸민 자는 말 잘하고 못난이는 침묵하며, 꾸민 자는 수고롭고 못난이는 편안하다. 꾸민 자는 해치고 못난이는 베푸나니, 꾸민 자는 재앙이고 못난이가 아름답다."
능주의 양팽손이 찬사를 적었다.
"왕도를 보좌할 선생께서 염계로 물러나 서투름을 길렀으니 보통 사람이 미칠 바 아니다. 남주가 베꼈으니 내 뜻도 같다."
생애는 짧았다. 중종 21년(1526), 향년 28세. 담양의 송순(宋純)이 조문하였다. "꽃샘 눈발 흩날리던 지난 봄, 그대는 우리 집에 말을 맸었지. 밤새 등불 돋우며, 삼년 이별을 더듬었네. 시인을 아끼지 않으신지라, 하늘도 은혜가 적으시구려!"
남주는 흔적이 없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전하는데, 상여가 너무 가벼워 열어보니 시 한 수가 있었다. "창해에서 배의 자취 찾기 어렵고, 청산에 학의 흔적 보이지 않네." 이때 허공에 풍악 울리고 남주가 말 타고 둥실 흰 구름을 타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