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설주에서 '성광성냥공업사' 간판을 겨우 읽어낼 수 있었다. 점퍼 차림의 손진국(75) 사장은 "아, 오셨능교?" 인사한 뒤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남은 성냥공장이라고, 기자나 작가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어가지만 소용이 없어요. '성냥 안 팔린다' '공장 어렵다' 만날 그런 얘기뿐이오. 어떻게 잘 됐다는 소식은 없고. 요즘에는 전화 오면 '오지 마시오' 합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요."

경북 의성읍내에서 의성향교(鄕校)로 올라가는 골목길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니 낡은 슬레이트 지붕 건물이 십여채쯤 됐다. 공장 안은 어두침침했다. 아낙네 대여섯명이 일하고 있었다.

"한창때는 직원만 162명 썼어요. 통근버스까지 있었죠. 읍내 사람들에게 외주 가공도 줬지요. 합판 재료를 대주고 성냥갑으로 붙여오면 개당 얼마씩 쳐줬어요. 의성에서는 다들 우리 공장으로 밥 먹고 살았는데."

날씨가 찼다. 손 사장이 공장 입구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녹슨 자물쇠를 열며 중얼거렸다.

"요즘에는 사무실을 쓸 일도 없어요. 공장이 활발하게 돌아갈 때는 여기 직원만 세 명을 뒀는데…. 이 안쪽엔 살림집으로 쓰고 우리 둘째 아들도 여기서 낳았지요. "

늘 비어 있었던 사무실은 추웠다. 전기난로를 갖고 왔다. 손 사장은 담배를 물고는 탁자에 놓인 성냥갑을 집었다.

손진국 사장은“평생 해온 성냥 공장을 대번에 문닫기 싫어 끌고왔는데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게 가정의 필수품이었지요. 대리점에서 서로 성냥을 달라고 했어요. 처음엔 손으로 다 작업했으니까, 정말 만들기 바빴지요. 촌에서는 송진이 많은 관솔가지에 유황을 묻혀 불을 옮기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화롯불을 꺼뜨리면 시집살이 못 한다고도 했고. 그때는 성냥이 '신문명'이었죠."

그는 18살에 성냥공장에 들어갔다. 햇수로 58년째 '성냥 인생'이다. 그는 원래 사장이 아니라 종업원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를 마칠 때쯤 6·25가 났어요. 피란 갔다가 돌아왔는데, 먹고살 길이 없었어요. 남의 집 일을 거들며 입에 풀칠을 했어요. 그때(1954년) 이북에서 피란 온 세 분이 공동출자해 마을에 성냥공장을 지었어요. 나는 종업원으로 들어간 거죠."

―당시만 해도 의성은 경북에서도 오지(奧地)였는데 여기에 공장을 지었군요.

"이 부락에는 전기와 수도도 안 들어왔어요. 공장을 돌려야 하니 전봇대를 세우고 대형수도관을 묻게 됐죠. 그때서야 마을에 전기와 수도가 들어온 거죠. 배 곯던 시절 밥 먹여주는 것으로 치면 공장이 자기들 부모보다 더 고맙지요."

공장 내부 풍경.

―종업원으로 들어가 어떻게 사장이 된 겁니까?

"나를 많이 신용하고 아껴줬지요. 아들보다 더 미더워했어요. 내가 일도 잘 했고요. 실제 공장 일을 도맡아 했지요. 40여년 전쯤 내가 전무가 됐을 때 '공장 자본을 늘릴 테니 이 기회에 너도 주식을 사서 들어오라'고 권했어요. 그때 내가 장만해놓았던 600여평의 밭뙈기를 팔고, 또 이분들이 도와줘서 300만원을 넣었어요. 나도 공동주주가 된 거죠. 창업주들이 모두 돌아가신 뒤로 내가 단독 대표이사를 맡게 된 거죠."

―한창 잘나갈 때 성냥갑이 얼마나 팔렸나요?

"그때 장부를 봐야 하는데, 내 머릿속에 있겠습니까. 아마 월매출이 6000만원쯤 됐을 겁니다. 당시 큰돈이었지요. 의성에 세금 내고 의성 사람들에게 월급 주고 좋은 일 했죠."

―사장님도 큰돈을 벌었겠습니다.

"성냥 팔아서 얼마 남는다고, 지금도 성냥 한 통에 공장 출하가가 750원입니다. 한통에 성냥개비가 550~600개쯤 들어가요. 커피 반잔 값도 못 되죠. 그렇다고 돈을 영 못 번 것은 아니지만, 그 돈으로 집이나 땅을 사놓았으면 부자가 됐을 텐데. 나는 성냥 말고 아는 게 없잖아요. 돈 있으면 성냥개비 재료인 포플러를 사러 다녔어요. 그게 없으면 공장을 못 돌린다고. 공장 구내에 포플러를 수북이 쌓아둬야 마음이 놓였죠."

―성냥개비는 왜 포플러로 만들었나요?

"포플러는 질기면서도 연하고 가벼워요. 또 파라핀을 바르면 흡수가 잘 됩니다. 성냥개비에 파라핀을 발라야 불길이 타고내려갈 수 있죠. 성냥개비 재료로는 최고인 셈이죠. 성냥공장마다 재료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쫓아다녔어요. 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속성 조림을 위해 산에는 아카시아, 들에는 이태리 포플러를 심도록 했어요. 하지만 5공(共)이 들어선 뒤로 포플러를 다 베어버렸어요. 포플러가 농경지에 지장을 준다고 베고,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도 베었어요."

―지금은 재료를 어디서 구합니까?

"목재상을 통해 힘들게 구해요. 성냥공장들이 없어지니까, 이제는 종묘회사와 경쟁합니다. 포플러를 톱밥으로 만들어 버섯 재배용으로 쓰거든요."

포플러는 건조작업을 거쳐 원통으로 잘린다. 이걸 얇게 깎아 종이처럼 2.2㎜ 두께로 편 뒤 잘게 썰어 성냥개비를 만든다. 국내 성냥개비의 길이는 4㎝8㎜와 4㎝2㎜다. 과거에는 장터에서 따로 성냥개비만 팔기도 했다.

"성냥공장이 잘 된다고 하니, 몇 년쯤 지나 의성 마을에만 성냥공장이 또 하나 생겼어요. 바로 지금 이 자리입니다. 그 공장은 기술력이 달려 망했어요. 성냥불이 잘 켜지고 불길이 연하게 일어나야 하는데, 피식거리고 꺼지면 안 팔리지요. 결국 우리가 그 공장을 인수해 여기로 옮겨온 겁니다."

―성냥공장에는 화재나 폭파 위험이 없습니까?

"사실 화약과 같거든요. 부주의로 조그만 불이 나기도 했죠. 하지만 원료가 서로 섞이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성냥개비와 적린(赤燐·성냥갑 껍데기)이 합쳐져야 불이 나죠."

―성냥액에도 기술이 있습니까?

"성냥개비에 바르는 혼합액에는 염소산칼륨·유황·유리가루 등 11가지가 들어가요. 어떤 비율로 배합하느냐가 관건이죠. 특히 염소산칼륨은 수입했거든요. 이를 조금만 넣고도 불이 잘 켜지고 많은 성냥개비를 만들어야 경쟁력이 있죠. 성냥공장 간에 가격과 품질 경쟁이 불붙자 자빠지고 무너졌어요."

한때 국내의 성냥공장은 30여 곳이나 됐다. 유엔표(유엔성냥)·아리랑표(조일성냥공장)·비사표(남성성냥)·기린표(경남산업사)·돈표(영화인촌) 등이다.

―군대에서 불렀던 '인천의 성냥공장' 같은 노래는 왜 만들어졌나요?

"인천에서 대한성냥공장의 '쌍노루표'가 제일 먼저 생겼어요. 하지만 그 공장은 제일 먼저 경쟁에서 무너졌어요."

―당시 최고의 강자는요?

"아리랑·유엔성냥·비사표 등이 우리보다 일찍 시작했고 많이 컸어요."

―아마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유엔팔각성냥이 익숙할 겁니다.

"부산에서 시작했는데 서울 사람이 인수했어요. 성냥광고를 제일 먼저 냈어요. 성냥 질은 그렇게 좋진 않았는데(웃음). 성냥공장은 잘 됐어요. 사장이 다른 사업도 하다가 그쪽에서 잘못돼 망했어요."

―성광성냥의 향로표는 실력이 어느 정도 됐습니까?

"비 오고 습도가 높은 날에는 성냥이 안 켜져요. 우리는 원료액에 카본을 섞어 습기에 강한 성냥을 만들었어요. 특히 어촌에서 인기가 좋았죠. 성냥통에 신라시대 향로와 함께 그려넣은 오리 이미지도 뱃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우리 성냥을 쓰면 오리가 물에 떠 있듯이 배가 가라앉지 않을 거라는 거죠. 또 성냥통을 합판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획기적이었어요."

―왜 그렇습니까?

"그전까지 성냥갑은 두꺼운 골판지로 만들었어요. 부뚜막에서 물이 스며들면 밑동이 푹 빠졌거든요. 그 뒤로 유엔성냥이 성냥갑을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어요."

―성냥공장이 사양산업이 된 것은 언제부터였지요?

"1990년대부터 성냥 매출이 떨어지는 조짐이 나타났어요. 과거에는 다방에 앉아 성냥개비로 탑을 쌓기도 하고 담배도 많이 피웠죠. 석유곤로를 켤 때도 성냥 대여섯개씩 그었지요. 그런데 일회용 라이터가 나오고, 가스는 자동 점화되고, 난방은 전기로 하는 세상이 되니 성냥이 필요 없어진 거죠. 내가 성냥 공장 사장이지만 우리 집에서도 성냥을 쓰는 일이 없어요."

―세상 흐름을 알고 다른 성냥공장들은 빨리 문닫거나 업종 변경을 했나요?

"대부분 재빨리 문닫았죠. 시세에 편승해 성냥공장에서 라이터공장으로 전환한 동업자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라이터공장을 한 사람들도 다 망했어요. 중국산이 들어왔거든요."

―본인은 성냥공장이 사양산업인 줄 몰랐습니까?

"대한민국에서 하나만 남으면 밥은 먹고 살지 않겠나, 이렇게 끌고 나온 것이 점점 더 되지 않는 거요. 이렇게 안 될 줄 몰랐지요."

―마지막(2007년)까지 함께 살아남았던 성냥공장이 기린표와 신흥표를 내던 경남산업사였지요?

"그 양반은 공장 기계를 다 팔아버렸어요. 대신 중국에서 성냥알맹이를 수입해와요. 그걸 자기네 상표 성냥통에 넣어주는 작업만 합니다. 공장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런 편법을 쓰는 바람에 국내에서 만드는 우리 공장만 골탕을 먹은 셈이지요."

―성광성냥도 몇 년 전 성냥개비에 혼합액을 자동으로 발라주는 기계를 한 대 팔았다지요?

"빚은 쌓이고 주문 물량은 줄어드니, 두대 중 한 대를 방글라데시로 팔아넘겼어요. 이것도 까먹고 저것도 까먹으니 어려워진 거죠."

―지금 성냥 수요는요?

"사찰이나 판촉·홍보물로 나가요. 일반 수퍼마켓 같은 데는 아예 취급도 안 합니다. 옛날에는 이사한 집에 찾아갈 때면 불꽃처럼 일어나라고 성냥을 선물로 사갔는데."

지금 성광성냥의 월 매출은 1200만원쯤 된다. 일거리가 있으면 공장을 돌리고 없으면 쉰다. 종업원은 아줌마 7명을 포함해 9명이다.

"사실은 월급쟁이인데 인건비 줄 형편이 못 돼요. 일당으로 쳐주지요. 당초에 둘째 아들이 공장을 맡아 해보겠다며 내려오지 않았으면…."

상무 직함을 갖고 있는 둘째 아들은 대구에서 광고기획사와 인쇄소를 운영한다. 거기서 번 돈으로 종업원 임금을 메꿔준다.

"매달 500만원쯤 적자가 나요. 벌써 치워야 하는데…. 내가 일생을 바쳤던 공장이라 대번에 문닫는 게 싫어서 끌고나온 거예요. 작년에 '그만두겠다'고 아들에게 말하니, '조금만 더 버텨보겠다'고 합디다. 개업이나 홍보용으로 성냥을 주문하는데, 올해는 경기가 안 좋아 문 닫는 데만 있지, 개업하는 데가 별로 없었어요."

그가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또 성냥을 켰다. 유황냄새가 났다. 성냥불은 '임무'를 마치고 금방 사그라들었다.

―불꽃으로 타올랐다가 스러져가는 것을 보면 어떤 상념이 듭니까?

"세상 흐름이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이런 공장 하나쯤은 남겨둬야 하지 않는가요. 우리가 살아온 흔적이 또 하나 없어지는 겁니다. 공장 설비를 그대로 두고 학생 견학용으로 하면 좋지 않겠나. 정부의 도움 없이는 안 돼요. 청원을 해봐도 반응이 없어요.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진 않지만 마지막까지 온 것 같아요."

며칠 뒤 성광성냥 공장은 연말에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