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로 치닫던 2002년 12월 7일, 종합 일간지 1면에 같은 광고가 일제히 실렸다. 당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이제는 반(反)정부 시위의 상징이 된 촛불 그림과 함께 게재한 선거 광고였다. "정치인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부끄러울 때가 없습니다. 미선아, 효순아, 다음에 다시 태어나거든 마음껏 외쳐라, 대한민국! 반드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주한미군이 몰던 장갑차에 여중생 두 명이 치여 숨진 사건으로 촉발된 반미(反美) 감정을 적극 활용한 광고였다.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에 "미국에 가지 않겠다" "반미면 어떠냐"고도 했다.
그런 노무현 후보의 대미관(對美觀)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극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7년 6월 2일 참여정부 평가 포럼에서 한 연설이 대표적이다. "진보 진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미국 콤플렉스가 있다"며 "이것은 벗어던져야 된다"고 일갈(一喝)했다. "반미는 열등감의 표현이고, 그것을 거꾸로 뒤집으면 사대주의(事大主義)"라고 했다. 아마도 무덤 속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금 살아온다면 한·미 FTA 비준동의안의 국회 통과후에도 반대 시위를 이끄는 민주당에 이 말을 다시 하지 않을까.
한·미 FTA는 지난 7월 발효한 한·EU FTA와 크게 다를 게 없다. 한·EU FTA가 한·미 FTA와 달라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EU FTA에 대해서는 비교적 잠잠하던 좌파가 이번에는 국회의사당에서 최루탄을 터트리고, 시위 현장에서 경찰서장을 폭행하는 테러를 일으키며 반발하고 있다.
이젠 미국을 경쟁하고 협력하는 국가 중 하나로 인식하는 국민들은 '반미(反美) 장사'를 다시 하려는 좌파의 속셈을 알아차린 듯하다. 이번 시위엔 주로 전문 시위꾼만이 거리를 누빌 뿐이다. 한·미 FTA에 불만이 없지 않은 일부 국민들도 세계 경제 10위권 국가 간의 통상 문제를 반미와 매국(賣國) 문제로 접근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번 시위는 한국 좌파의 시대착오적 인식과 전략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 서해를 무법천지로 만드는 중국을 향해 반중(反中) 시위라도 하면서 한·미 FTA에 대해 '매국노 처단' 시위를 한다면 국민의 공감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도 없이 유독 미국 얘기만 나오면 밥상을 팽개치고 거리로 나오는 데서 이젠 진부함마저 느껴진다. 굳이 표현을 하지 않는 시민들도 이들이 1980년대 읽던 책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을 알기 시작했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기록적인 500만표 차이로 낙선한 후 미국으로 숨었던 정치인이 이 시위의 맨 앞에 서는 것에 대해서도 냉소(冷笑)가 퍼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미를 활용해서 당선됐지만, 5년간 청와대에 있으면서 자기가 알지 못하던 세상을 깨쳤다. 그랬기에 임기 말년에는 "미국을 배타적으로 배척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지금은 '미국의 종언(終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의 힘이 예전과 같지 않은데 한국의 수구(守舊) 좌파만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난 채 미국을 두려워하고 있다.
입력 2011.12.0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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