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9일 동남아의 화려한 '극장'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참석한 것은 미국이 동아시아 정치 무대에 드디어 복귀하였음을 시각적으로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다. 1960년대 일본이 경제적으로 도약하고 1970년대 중국이 '죽(竹)의 장막'을 뛰쳐나온 이후로는 줄곧 동아시아가 미국 외교의 중심에 있었으니, 미국의 재등장을 귀환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로 이어지는 이슬람 과격파와의 전쟁에 매달려 있었던 미국이 이제 그 늪을 벗어나 국제 정치와 경제의 새로운 중심이 된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발발한 직후 '아세안+3(한·중·일)'이 출범한 것은 동아시아 시대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그 회원국들의 당면한 경제위기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본·기술 강국인 동북아 3국을 초청하여 창설한 것이 아세안+3이다. 애초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의례적인 정상회의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명실상부한 지역협력체로 발전하게 됐다. 동남아와 동북아 13개국은 이제 새로운 동아시아로 어우러져 경제·사회문화·정치안보의 세 분야에서 진행되어 온 지역통합 추세를 지지하면서 다각적이고 다양한 지역협력을 모색해 왔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중동전쟁에 정신을 팔고 일본이 경기침체로 주춤거리는 사이에 중국이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부상한 것은 불가피한 흐름이었다.
2005년 12월 아세안은 동북아 3국에다 인도·호주·뉴질랜드의 3국까지 끌어들여 이번에는 동아시아정상회의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불과 5년 뒤, 지역적으로 이미 동아시아의 경계를 넘어선 이 협의체는 미국과 러시아까지 그 회원국의 범위를 확대하였다. 그 배경과 과정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았지만 아세안+3에서 중국의 독주를 견제하고, 동남아 외부 국가들의 경쟁을 유도하여 더 큰 협력과 지원을 얻어내겠다는 아세안의 의도가 작용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동아시아정상회의는 '동아시아 정상들의 회의'가 아니라 '동아시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세계 정상들이 모인 회의'가 된 것이다. 세계열강들까지 끼어든 동아시아 지역통합은 앞으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특히 미국의 복귀는 여기저기서 그 사실이 확인되고 충격이 느껴진다. 이번 제6차 동아시아정상회의는 모든 이목과 각광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동북아 3국의 비중이 크게 감소해 버렸다. 미국의 참석에 용기를 얻은 아세안 5개국 정상이 남중국해 영토분쟁을 언급함으로써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또한 미국이 봉쇄조치를 가하던 미얀마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을 보내 민주화 및 인권개선 상황을 확인해 보겠다고 한 오바마의 발언은 미국의 대(對)미얀마 외교가 적극적인 관여정책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오바마 행정부의 동남아 정책, 나아가 동아시아 정책은 취임 초기부터 부시 행정부와 차별성을 분명히 했는데 당면한 금융위기로 그 행보가 다소 더디어졌을 뿐이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직후 클린턴 국무장관은 첫 해외방문 대상으로 아세안 사무국을 선택했고, 매년 미(美)·아세안 지도자회의를 개최하여 양자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금번 제3차 회의에는 직접 참석하여 무려 35개 항목에 이르는 합의사항을 일구어냈다. 또한 미국은 올해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아세안 상주 대표부를 설치하고 대사를 임명하였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인도네시아를 회원국으로 갖고 있는 아세안은 3대 인구 대국인 중국·인도·미국을 지역 협력과 통합의 장(場)에 참여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에 러시아와 일본까지 포함시킨다면 동아시아정상회의는 사실상 세계 최대의 지역협력체가 된다. 동남아는 아세안, 아세안+3, 동아시아정상회의 외에도 아셈(ASEM), 아세안지역포럼(ARF),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에 적극 참여하거나 주도함으로써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정치와 경제의 허브로 부상하였고, 이제 그 중심이 될 날을 꿈꾸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옛날부터 개방된 지역체제였다. 그 결과 인도와 중국 문명이 동남아의 정신세계를 형성했고, 이어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가 시대별·지역별로 나눠 동남아의 물질세계를 장악하였으며, 20세기 들어서는 미국과 일본까지 가세하여 동남아를 이념과 경제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이 문명과 제국들이 세계문명이 되고 패권국으로 부상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들어 동남아는 드디어 이 문명들의 기운과 역사적 경험을 밑천으로 삼아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시도하고 있다. 작지만 역동적인 동남아와 활기찬 지역협력기구 아세안이 세계의 대국들을 어떻게 다루어나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