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막 내린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예술 총감독 박세원)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무대의 색(色)을 시시각각 바꾸는 '조명'이었다. '라 트라비아타'는 부잣집 청년 알프레도와 아름다운 창녀 비올레타의 사랑 이야기. 1막의 한 장면, 손님이 모두 떠나고 파티장에 홀로 남은 비올레타 등 뒤로 저녁노을에 가까운 오렌지빛이 넓게 퍼졌다. 조명 디자인을 맡은 고희선(48)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대미술과)는 "사교계의 여왕이 느끼는 고독과 다가올 비극을 중첩시키기 위해 천장 조명에 색 필터를 겹겹이 끼워 빛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빛(光)으로 그림을 그리다

연극·뮤지컬·오페라에서 두루 활약하며 최고 조명 디자이너로 꼽히는 고희선씨는 "화가가 붓으로 물감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면 나는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라 트라비아타’무대의 조명‘마술’에 대해 설명하는 고희선.

공연장마다 차이는 있지만 고희선은 한 번에 조명 400개를 주무른다. 공연당 작업 시간은 하루 13시간씩 4~10일. 조명에 따라 관객이 받는 감동은 천지 차이다. "미팅할 때 '조명발' 중요하잖아요? 약간 어두침침해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고 분위기 있게 은은히 비춰주는 조명이 최고지요. 무대도 마찬가지예요. 근사한 의상 입고 근엄한 표정 지어도 조명 잘못 쓰면 정육점 고깃덩이 같고, 좀 초라해도 고급스럽게 비추면 성인(聖人) 느낌을 내거든요."

파란빛은 밤이나 슬플 때 주로 쓴다. 비올레타가 죽는 장면에서 무대가 푸른 빛으로 뒤덮였던 건 그 때문. "죽음과 관계된 장면에선 대개 빨간빛을 쓰지만 비올레타는 피를 흘리며 죽는 게 아니라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는 거니까…. 대신 오페라 '가면무도회'에선 주인공이 칼에 찔리는 순간 새빨간 빛을 드리웠어요.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관객이 몰입할 수 있지요."

색(色) 잘 쓰는 여자

고희선은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카르멘', 신시 뮤지컬 컴퍼니의 뮤지컬 '렌트', 국립극장 창극 '십오세나 십육세 처녀' 등으로 기억된다. 심리학을 전공한 고희선은 전공 수업 때 사이코드라마(심리극)에서 조명을 잡았다가 아예 그 길로 방향을 틀었다. 무대미술(위스콘신대)·조명디자인(미시간대) 석사를 따고 1997년 귀국했다.

썰렁했던 무대가 그의 빛을 받으면 생기를 띠는 걸 두고, 무대미술가 박동우는 "고희선은 우리나라 조명의 선구자이자 큰언니"라고 했다. '큰언니'의 목표는 "남들 안 쓰는 빛깔로 인간사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