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막 내린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예술 총감독 박세원)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무대의 색(色)을 시시각각 바꾸는 '조명'이었다. '라 트라비아타'는 부잣집 청년 알프레도와 아름다운 창녀 비올레타의 사랑 이야기. 1막의 한 장면, 손님이 모두 떠나고 파티장에 홀로 남은 비올레타 등 뒤로 저녁노을에 가까운 오렌지빛이 넓게 퍼졌다. 조명 디자인을 맡은 고희선(48)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대미술과)는 "사교계의 여왕이 느끼는 고독과 다가올 비극을 중첩시키기 위해 천장 조명에 색 필터를 겹겹이 끼워 빛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빛(光)으로 그림을 그리다
연극·뮤지컬·오페라에서 두루 활약하며 최고 조명 디자이너로 꼽히는 고희선씨는 "화가가 붓으로 물감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면 나는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공연장마다 차이는 있지만 고희선은 한 번에 조명 400개를 주무른다. 공연당 작업 시간은 하루 13시간씩 4~10일. 조명에 따라 관객이 받는 감동은 천지 차이다. "미팅할 때 '조명발' 중요하잖아요? 약간 어두침침해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고 분위기 있게 은은히 비춰주는 조명이 최고지요. 무대도 마찬가지예요. 근사한 의상 입고 근엄한 표정 지어도 조명 잘못 쓰면 정육점 고깃덩이 같고, 좀 초라해도 고급스럽게 비추면 성인(聖人) 느낌을 내거든요."
파란빛은 밤이나 슬플 때 주로 쓴다. 비올레타가 죽는 장면에서 무대가 푸른 빛으로 뒤덮였던 건 그 때문. "죽음과 관계된 장면에선 대개 빨간빛을 쓰지만 비올레타는 피를 흘리며 죽는 게 아니라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는 거니까…. 대신 오페라 '가면무도회'에선 주인공이 칼에 찔리는 순간 새빨간 빛을 드리웠어요.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관객이 몰입할 수 있지요."
◇색(色) 잘 쓰는 여자
고희선은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카르멘', 신시 뮤지컬 컴퍼니의 뮤지컬 '렌트', 국립극장 창극 '십오세나 십육세 처녀' 등으로 기억된다. 심리학을 전공한 고희선은 전공 수업 때 사이코드라마(심리극)에서 조명을 잡았다가 아예 그 길로 방향을 틀었다. 무대미술(위스콘신대)·조명디자인(미시간대) 석사를 따고 1997년 귀국했다.
썰렁했던 무대가 그의 빛을 받으면 생기를 띠는 걸 두고, 무대미술가 박동우는 "고희선은 우리나라 조명의 선구자이자 큰언니"라고 했다. '큰언니'의 목표는 "남들 안 쓰는 빛깔로 인간사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