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정부가 23일 신임 주미(駐美) 대사에 셰리 레흐만(51) 전 정보부 장관을 임명했다고 더타임스가 24일 보도했다.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의 측근인 후사인 하카니 전 주미 대사가 미국 측에 "파키스탄 군부의 쿠데타를 막아달라"고 요청하는 메모를 전달했다는 이유로 22일 사임한 지 하루 만에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외신들은 '메모 사건'으로 인해 파키스탄이 군부의 측근을 대사로 임명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대표적인 진보정치인으로 알려진 인권운동가 레흐만을 임명한 것에 대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47년 인도에서 분리독립한 파키스탄에서는 군부가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인도와의 대치·긴장상태가 지속돼 왔고 이슬람주의자들이 군부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간정부와 군부 사이의 알력이 끊이지 않았다.
레흐만 신임 대사는 군부와는 대립관계에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여성인권보호·소수종교차별철폐 등을 추진하며 이슬람주의자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군부가 1980년대 중반 제정한 신성모독죄에 대해 지난해 법률개정안을 제출했다는 이유로 이슬람극단주의자들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고 있다. 파키스탄 남부 카라치에 있는 그의 자택에는 방탄유리가 설치돼 있을 정도라고 더타임스는 전했다. 그는 2007년 자살폭탄 테러로 숨진 베나지르 부토 전(前) 총리의 각별한 친구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번 인사에 대해 환영할 것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인권보호·언론자유 등을 추진해온 레흐만과 미국의 코드가 맞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지난 5월 오사마 빈라덴 사살 이후 "파키스탄 정부가 빈라덴 은신을 묵인한 것 아니냐"며 군사 원조 중단을 검토하고 있는 미 정치권을 설득하는 일이 신임 대사의 최우선 과제라고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레흐만이 군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페샤와르대학 이자즈 칸 교수는 "레흐만 임명은 군부의 악랄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미국의 입맛에 맞으면서도 자신들의 안보관과 같은 인물을 골라 잇속을 챙기려 한다는 것이다. 레흐만 임명 아이디어는 군부에서 먼저 나왔다고 로이터가 23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