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밤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들이 가야금으로 아리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 중반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부분이 끝나자 갑자기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가 해금으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19일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학생들이 가야금과 해금으로 아리랑과 어메이징그레이스를 편곡해 연주하고 있다.

가야금의 아리랑과 해금의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씨실과 날실처럼 엇갈리며 기념관을 메웠다. 어울릴 법하지 않은 한국과 영국의 대표적인 선율이 한 몸처럼 묶인 이유는 연주자가 가진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한복을 차려입은 여학생들은 탈북대안학교인 여명학교 학생들이다. 이날 열린 여명학교의 후원회 밤에 학생들은 3개월의 편곡과 준비 과정을 거친 이 두 곡을 멋지게 연주했다.

여명학교 학생들은 굶주림 끝에 7000㎞라는 먼 거리를 이동해 남한 땅에 도착했다. 학생들은 지구 반지름보다 긴 7000㎞를 이동하면서 부모가 죽거나 동생이 사경을 헤매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19일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가야금과 해금으로 어메이징그레이스 배경으로 아리랑을 들려주고 있다.

밥 대신 한(恨)을 먹고산 이들에 우리 민족의 한이 승화한 아리랑은 어울리는 조합이다. 아리랑에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섞은 배경에 대해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은 "우리 학생들 대부분이 중국 본토에서 선교사나 현지 교회의 도움으로 남한 땅에 왔다"며 "신앙이 없었으면 학생들은 한으로만 가득했겠지만, 이제 남한에서 통일 한국의 가교(架橋)를 맡고자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두 곡의 연주는 여명학교 학생들의 삶을 압축해 전달한 셈이다.

연주 후에 한 학생이 나와 자신의 꿈에 대해 영어로 이야기했다. 외교관이 꿈이었던 장진석 군은 자신의 가족이 불순분자로 분류되는 계급이어서 대학조차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여느 탈북자처럼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탈출 시기를 보내고 꿈꿀 수 있는 남한 땅에 도착했다.

19일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의 장진석 군이 남한에 오고나서 바뀐 자신의 꿈에 대해 영어로 설명하고 있다.

장진석 군은 자신의 꿈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큰 나무가 되고 싶다. 통일이 되면 북한 인민이 쉬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늘을 가진 나무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남한에 온 탈북 청소년들은 통일 한국 시대에 남·북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간극을 메우는 '시멘트'가 될 사람들이다. 이미 남한에 온 탈북자 2만3000명 중에 청소년은 20%인 4500여명에 달한다.

19일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학생들이 태권도 시범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국내 학교에 편입해 다니는 탈북 청소년들은 또 다른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다. 북한에서 배고픔에 굶주리면서 자라다 보니 탈북 청소년들은 남한 아이들보다 체격은 왜소하고 키는 작다. 한글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탈북청소년들이 선행학습·경시대회가 뽐내는 일반 학교에서 수업을 따라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일반 학교에 다니는 탈북 청소년 중에 10% 이상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다. 남한 학생보다 10배 높은 비율이다.

탈북자 구조단체인 북한정의연대 정베드로 목사는 "전교생이 70명뿐인 여명학교를 확대하거나 비슷한 탈북청소년 맞춤형 학교가 곳곳에서 세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19일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후원의 밤'에서 배우 차인표씨가 탈북 학생을 도와 통일을 준비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후원의 밤 행사는 학생들을 돕겠다고 서명하는 약정식으로 끝났다. 약정식을 진행한 배우 차인표씨는 "탈북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왕따 당할까 봐 ‘조선족이라고 거짓말한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다"며 "여명학교 같은 탈북청소년 학교에 대한 정부, 민간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한 후 약정서에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