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40)이 한국에 온다. 오는 17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지휘하는 시드니 심포니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번 방한에도 60대인 어머니와 함께다.

지난 2006년 4월 8일 예술의전당 리허설 무대. 키신이 갑자기 연주를 멈췄다. 모친 에밀리아가 "얘! 얘!" 하고 신경질을 냈기 때문.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 두 번째 마디는 더 크게 쳐야지. 이래서 제대로 연주하겠니?" 에밀리아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아들의 팔을 툭툭 쳤다. "모든 걸 너무나 쉽게 연주한다"는 평을 듣는 천재 피아니스트도 엄마의 불호령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다.

무대 위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음악가들이 알고 보면 엄마나 아내에게 꼼짝을 못한다. "음악 영웅을 만드는 이는 바로 '여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 음악가들은 말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엄마와 아내다."

엄마와 나

에밀리아는 키신이 스승 안나 칸토르와 해외 투어 때에도 동행(同行)한다. 리허설 검사는 물론이고 공연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음향도 살핀다. 칸토르는 키신이 30년 넘게 유일하게 모시고 있는 스승이다. 그래서일까. 독신인 키신은 지금까지 연상의 여인만 사귀었고 나이 차도 최소 10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외국 얘기만은 아니다. '정 트리오'를 만든 고(故) 이원숙 여사에 대해 딸 명화(67)는 "섬세한 바이올린보다 묵직한 첼로가 내게 잘 맞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먼저 아셨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광복 후 시장에서 국밥 장사를 할 때 아이들 언행이 거칠어지자 외상으로 피아노를 들여놨고, 피란길에도 트럭에 피아노를 챙겨 떠났다.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로 추앙받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어머니만은 매우 사랑했다. 1906년 프로이트는 말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진단했다.

옛 동독의 심장 라이프치히에서 2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교향악단을 이끄는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와 두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천재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오른쪽 위).

애처가인 나

국내 잉꼬부부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65)와 윤정희(67)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9월 연평도에서 백건우가 '섬마을 콘서트'를 할 때, 윤정희가 간장게장을 먹고 체해 리허설을 함께할 수 없었다. 백건우는 연습 내내 부인이 있는 방을 쳐다봤고, 리허설이 끝나자 부인 곁으로 달려가 간호했다.

세계적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63)의 매니저는 부인 에블린이다. 연주 일정부터 연주료까지 부인이 모두 관리한다. 마이스키는 음향 엔지니어였던 첫째 부인과 이혼한 후 거액의 위자료를 주느라 텅 빈 통장 잔고를 메우기 위해 동분서주 연주회를 뛰었고 그때 공연장에서 에블린을 만나 재혼했다. 공연 관계자들은 공항에 마이스키를 마중나가면 두 번 놀란다. 미모를 뽐내며 모델처럼 걸어나오는 젊은 부인에게 먼저 놀라고, 그 뒤에서 첼로와 여행가방, 부인의 핸드백까지 짊어지고 따라오는 거장을 보고 또 한 번 놀란다.

애처가가 있으면 공처가도 있는 법.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리카르도 샤이(58)는 불 같은 기질을 가진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화는 부인이 더 잘 낸다. 지난 3월 내한했을 때 그의 부인은 호텔방 바닥재가 마음에 안 든다며 전면 교체를 요구했다. 관계자들이 쩔쩔매는 사이 더 당황한 샤이는 부인 눈치만 살폈다.

왜 그럴까

음악의 세계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논리화·계량화하기 힘들다. 송재영 빈체로 홍보마케팅팀 부장은 "음악가와 오랜 시간 함께하는 가족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최상의 파트너"라고 설명했다. 경제적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송재영씨는 "매니저 업무를 부인이 맡으면 비용이 안 드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일대일(一對一)로 이뤄져 온 도제(徒弟)식 음악교육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바흐와 하이든의 시대에는 아버지가 곧 음악적 스승이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마찬가지.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교육자이자 감시자인 스승의 역할을 현대의 엄마들이 물려받게 됐고, 결혼하면서 그 몫은 부인에게로 넘어갔다. 음악가는 음악만, 뒷수습은 엄마나 아내가 처리하는 구도가 됐다는 얘기다.

음악 칼럼니스트 류태형씨는 "악기는 혼자 하는 것이라 음악가는 자기 외의 세계에는 관심을 잘 두지 않는다"고 했다.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 리스트와 마리 다구 부인처럼 옛날에는 귀족의 후원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었으나 지금은 음악가가 직접 계약하고 연주도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엄마나 아내가 그 일을 도맡는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