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남식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중동정치

지난주 찾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웨스트뱅크 곳곳에는 선명한 구호가 새겨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UN 194!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것입니다." 유엔의 194번째 회원국이 되기를 희구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열망이었다. 마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유네스코 가입이 확정된 직후여서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사뭇 들떠있었다. 드디어 한 발을 뗀 셈이다. 새로운 변화가 도래하는 것일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유엔 정(正)회원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크지 않다.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보리 결의가 필요한 정회원국 지위 대신 로마교황청 같은 옵서버 지위를 총회를 통해 얻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1948년 5월 14일은 이스라엘에겐 2000년 동안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이산·離散)의 시대를 끝내고 조상의 땅인 시온에 나라를 세운 기쁜 날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날은 그동안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대재앙의 날(알 나크바)'이 되었다. 어떤 이에게는 이날이 대희년(大禧年), 해방의 절정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역사적 치욕의 날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증오를 갈무리하며 같은 공간에서 살면서 무던히도 싸웠다. 그래도 사람답게 살아야겠기에 그들은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어떻게 해서든 평화를 얻고자 열망했고, 그 귀결점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한 협상은 지금껏 지지부진했다. 무엇보다 주권국가 팔레스타인의 모습을 규정해줄 최종 지위 협상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협상의 핵심 쟁점은 세 가지이다. 동(東)예루살렘 영유권, 유태인 정착촌 철수,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문제이다. 모두 한 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사안이다. 금번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의 유엔 가입 신청은 지지부진한 협상 국면을 깨기 위한 파격이다. 지금으로서는 타협 자체가 어려우니, 차라리 일단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자리매김한 뒤에 이스라엘과 협상을 이끌겠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압바스의 승부수는 재스민 혁명 이후 아랍을 강타하고 있는 정치 변동의 물결을 탄 것이다. 그가 미국의 원조 중단 위협에도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이유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제 역사적 변곡점에 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민주화와 정권 교체라는 미증유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아랍인들에게 지금이 오랜 염원인 팔레스타인 독립의 호기가 아닐까 하는 속내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번에 베들레헴에서 만났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명 예전과 다른 기대를 품고 있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사면초가(四面楚歌)다. 재스민 혁명 이후 안보 위협은 크게 늘어났다. 남쪽에서 든든하게 친분 관계를 유지하던 무바라크가 물러났다. 겉으로야 티격태격했지만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믿었던 시리아의 바샤르 대통령도 위기다. 레바논에서는 숙적 헤즈볼라가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그나마 중동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주던 오랜 친구 터키마저도 완전히 등을 돌렸다. 무엇보다 1967년 전쟁 이전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평화 협상을 해야 한다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지난 5월 국무부 발언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상황 변화와 맞물려 강경파 네타냐후 총리와 그보다 더 강경하다는 리베르만 외무장관이 이끄는 이스라엘 내각은 더욱 보수화되는 국면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이스라엘이 어수선한 안팎을 다잡기 위해 독자적 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반(反)이스라엘의 거점이라고 믿는 이란에 대한 공격설이 최근 나오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미국도 난처하기 짝이 없다. 아랍의 정치 변동 이후 어떻게 해서든 아랍의 마음을 얻으려고 공공 외교의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막대한 원조를 팔레스타인에 제공하던 터라 더 박탈감이 클 것이다. 전임 부시 대통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전향적 태도를 보여왔던 오바마 대통령이지만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문제만큼은 도저히 팔레스타인을 지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재스민 혁명 과정에 이어 이번 사안 역시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만들었다.

유엔에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은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내에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더 보수화할 이스라엘은 협상 자체를 거부하며 정착촌 확대 및 강경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 팔레스타인은 국제사회의 지지 확인이라는 명분을 얻었지만, 평화 협상은 더 험난한 길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