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를 순환하는 모노레일이 운행도 제대로 못해보고 애물단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당초 이 사업은 도로 위에 궤도를 놓는 노면 전차(電車) 방식이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공중궤도 방식으로 변경돼 건설되었고 시험운행 중 안전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개통이 올스톱 되었다.
전차는 기차보다 일찍 이 땅에 들어 온 신문물이다. 고종은 1896년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른 후 빈번하게 황후가 묻힌 홍릉(당시에는 청량리)으로 행차했다. 한 번 행차할 때 마다 가마를 탄 수많은 신하를 거느렸기 때문에 10만원가량의 경비가 지출되었다. 당시 10만원은 80㎏ 쌀 1만가마 이상을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이때 미국인 콜브란은 고종을 알현하고 전차의 속도와 편리성 그리고 경비 절감에 대해 설파했다. 솔깃해진 고종은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출자액의 절반을 부담하기로 한다.
전차는 1899년 5월 4일 오후 3시, '땡땡땡'거리며 동대문~경희궁~흥화문 간 첫 운행에 성공했다. 요금은 당시 쌀 1㎏ 가격에 해당하는 4~5전으로 비싼 편이었는데 전차만 타다가 재산을 탕진한 사람이 적지 않다고 당시 신문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 땅 최초의 대중교통 수단인 전차는 이후 부산과 평양에도 가설되었다. 두 도시에 앞서 인천에서도 전차 운행계획이 세워졌다. 인천부사(仁川府史)에 의하면 1907년 3월 인천전기주식회사는 인천부(현 인천시)에 전차 설치 허가원을 제출했다. 운행구역은 시내선과 시외선으로 나뉘었다. 시내선은 인천역에서 해안도로(현 아트플랫폼 부근)를 거쳐 중앙동까지 1구간, 중앙동에서 해안도로(옛 인천우체국 부근)를 거쳐 선화동까지 1구간, 중앙동에서 경인가도(싸리재 부근)를 거쳐 축현역(동인천 참외전 부근)까지 1구간, 중앙동에서 홍예문을 지나 축현역까지 1구간 코스였다. 시외선은 선화동에서 축현역까지 1구간, 축현역에서 인천기상대 아래 만석동까지 1구간, 만석동에서 인천역까지 1구간이었다.
요금은 시내·시외선 모두 1구간에 5전이었다. 시내선은 10분에서 15분 간격으로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시외선은 20분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행할 계획이었다. 특이한 점은 서울과 달리 승객뿐만 아니라 곡물을 비롯한 화물운송까지 고려했고 이는 당시의 축항(항구) 설계와도 맞물렸다. 그러나 운영주체인 인천전기가 경영난을 겪으면서 경성의 한일와사전기에 매각됨으로써 이 사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전차 부설의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가 1938년 경성전기는 송도유원지 행락객 유치를 위해 경인선 상인천역과 수인선 인천항역 간을 연결할 전차 운행 계획을 세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경성전기는 당시 송도자동차회사가 가지고 있던 인천항역~송도유원지 간 버스 영업권을 인수했지만 중일전쟁 여파 등으로 전차 운행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이즈음 1938년 9월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의 봉천교통에서는 조선의 소년소녀를 전차 승무원으로 100명을 모집하겠다고 발표했는데 각지에서 응모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특별히 개항장 인천의 부립직업소개소에 모집을 의뢰했고 인천에서 약 50명 정도 채용될 것으로 예상했다.
광복 후에도 서민들의 발노릇을 톡톡히 하던 전차는 교통개선책에 의해 서서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1966년 6월 김현옥 서울시장은 전차궤도를 단계적으로 철거하고 뜯어낸 궤도는 인천, 김포, 의정부 등 서울 외곽의 위성도시에 부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서울의 전차는 70년 가까이 운행되다가 1968년 11월 30일 마지막 종소리를 울리며 멈춰 섰다. 그러나 퇴역한 서울의 전차는 다른 도시에서 운행되지 못했다.
2006년 인천시는 중구 신포동과 월미도 일대의 관광 활성화를 목적으로 전차 운행 계획을 세웠다. 인천역~아트플랫폼~신포 문화의 거리를 잇는 1.6㎞의 신포동 구간과 인천역에서 월미도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월미도 구간 4.3㎞ 등 모두 5.9㎞로 예정해 2009년 6월에 1차 개통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노면 대신 공중에 모노레일을 깔면서 사업이 다시 무산돼 인천에서는 끝내 전차 종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