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보〉(110~124)=박정상은 국내 대표적 장고파(長考派) 중 한 명. 뻔한 장면(?)에서도 확인을 거듭하며 물 쓰듯 시간을 소비한다. 첫 느낌에 의한 직관(直觀)이 정답일 때도 물론 있지만, 장고를 통한 집중은 대개 더 좋은 수를 잉태한다. 실책이 나올 개연성도 크게 준다. 재미있는 것은 장고파와 마주 앉는 상대도 '전염'돼 착점속도가 함께 느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

흑이 ▲로 움직였다. 다음 '가'면 하변 백은 패(覇)에 걸린다. 하지만 박정상은 거의 바닥난 시간을 쥐어짜 110에 붙여갔다. 중앙 흑세를 지우는 일이 더 급하다고 판단한 것. 111로 '나'면 백114, 흑113 다음 백 '다'로 중앙이 붕괴된다. 115까지 쌍방 지모(智謀)를 다 한 수순으로 적진을 깨고 있다.

백은 112부터 초읽기가 시작됐다. 아직 바둑판의 절반도 못 메웠는데 주어진 3시간을 모두 소진한 것. 이제부터는 5분 안에 모든 수를 결정해야 한다. 허영호의 잔여시간도 40분뿐이다. 116으로 참고도 1은 5까지 필연. 이후 16까지를 상정하면 흑이 반면(盤面) 10집 정도 앞서는 형세다. 121로 '라'에 두어 사는 건 너무 느슨하다. 잠시 뒤 좌하 일대서 또 한바탕 태풍이 몰아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