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숨져 있다. 군복에 불이 붙은 인민군 병사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이미 타버린 집 지하에서 소녀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울었다.

재불(在佛) 화가 방혜자(74)에게 '빛'은 생명이고 평화다. 어둡고 암울한 현대사를 살아낸 그에게 빛은 동경이고 희망이었다. '개울물 속 조약돌에 일렁이는 저 햇살을 그림으로 그릴 수 없을까' 생각했던 일곱 살 소녀는 한 줄기 빛을 화두로 잡고 50년 화업(畵業) 인생을 바쳤다. 시인 김지하는 방혜자의 그림을 '어둠에 싸인 묵시처럼 미미하게 빛나는 흰 그늘, 땅속에 숨은 빛'이라고 칭송했다.

도불(渡佛) 50년을 맞아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빛의 울림'전을 열고 있는 방혜자를 만났다. 빛의 은은한 향연 한가운데 노(老)화가는 작은 새처럼 앉아 있었다. "아유, 다행이에요. 나는 (기자) 이름만 듣고는 남자분일까 봐 겁먹고 있었는데…." 한국은 물론 유럽 화단에도 명성을 날린 추상(抽象)의 대가이니 당연 '여걸'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단아한 물빛 한복 차림의 방혜자는 빛과 더불어 살아온 한 생애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들려줬다.

빛을 그린다. 한 줄기 빛이 우주 만물로 퍼져나가는 장관을 그리기 위해 어떠한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도불 50주년 기념 전시회를 위해 파리의 화실에서 작업하는 방혜자의 모습을 프랑스 사진작가 실바 빌로르(Villerot)가 찍었다.

독경 소리 가득한 새벽의 법당처럼

―한국의 젊은이들은 화가 방혜자를 잘 모릅니다. 섭섭하시지요?

"전혀요. 요즘 한국에 들어오면 내가 외계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져요. 젊은 사람들 말은 도통 알아듣지 못하거든요.(웃음)"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화가인데, 그곳엔 젊은 팬들도 있나요?

"세대를 떠나 생명의 원천 혹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제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명상이 되어 좋대요. 전시장에 들어와서 나갈 때의 표정이 평온하고 밝아지니 저도 참 좋아요. 시대가 황량하고 물질주의로 흘러가니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왜 '빛'을 그리십니까.

"태어날 때부터 목숨이 가물가물했을 만큼 약했고 전쟁 피란통에는 또 장결핵을 앓아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지요. 식민지, 해방, 전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젊은 날 또한 시대적 상흔으로 얼룩졌지요. 그래서 평화, 사랑, 생명의 존귀함에 일찍 눈뜬 것 같아요. 생명의 원천이 빛이잖아요."

―처음부터 '빛을 그리자' 생각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고.(웃음) 서울대 회화과 시절에 그린 '서울 풍경'을 장욱진 선생님이 크게 칭찬하시면서 상을 주셨는데, 구상(具象)인 그 그림에서부터 한 줄기 빛이 보여요. 1966년엔가 파리의 오랑주리미술관에서 열린 '베르메르의 빛 속에서'라는 전시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지요. 빛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이화여대 윤난지 교수는 '독경 소리로 가득 찬 새벽의 법당처럼, 장미창의 오색 빛으로 물든 오후의 성당처럼, 방혜자의 그림은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준다'고 썼습니다.

"내면을 비추는 빛, 안으로부터 오는 빛. 빛의 눈으로 바라보면 사물의 본질, 인간의 본성까지도 꿰뚫어보게 됩니다."

―방혜자의 '빛그림'은 한낮의 태양처럼 눈부시지 않아서 좋습니다. 창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처럼 은은합니다. 생전에 박경리 선생은 '해 뜨기 전의 아침을 느낀다'고 쓰셨습니다. 빛을 대체 어떻게 그리십니까.

"빛은 파장이잖아요. 퍼져 나가죠. 사이사이 색의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니 얇은 막을 수십번 겹쳐 칠하고, 지웠다가 다시 문지르고, 종이를 구겼다 폈다 해야 하고요. 빛이 스며들면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종이의 뒷면까지 색칠합니다."

―흙, 석채 등 천연염료만 사용하시지요?

"내가 추구하는 게 원초적인 생명이니까,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를 써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실험을 해왔어요. 프랑스에서는 내 그림을 '색채의 시학'이라고 합니다."

― 천체 물리학자들과 가깝게 지내신다던데요.

"사물을 뚫고 들어가면 그 속에 금강석같이 빛을 발하는 입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그렸더니 스위스의 한 천체연구소에서 연락이 왔어요. 당신은 과학자도 아닌데 어떻게 자신들이 오랜 시간 연구를 통해 얻은 것과 거의 흡사한 모양의 빛의 입자를 그렸느냐며 놀라더군요. 마리퀴리대학에서는 천체물리학자와 내가 공동으로 강연을 했더랬지요. 그가 보여준 빛의 입자와 내 그림이 오버랩되는 화면은 정말 감동적이었죠. 직관은 과학과 통하는 데가 있어요."

그림은 마음으로 그리는 것

―'마음의 침묵'(여백)이라는 선생님 에세이를 보니 식민시대의 악몽에 오래 시달렸다고 적으셨더군요.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신사 참배와 '천황폐하 만세!'로 시작됐어요. 태평양전쟁이 심해지자 아이들에게까지 국방색 군복에 콩주머니를 채워 훈련을 시켰지요. 천황의 항복 후 일본 아이가 떠나면서 주고 간 인형을 집에 가져왔더니 어머니가 '천치바보'라고 화를 내시며 당장 갖다 버리래요. 그날 밤 무서운 꿈을 꾸었지요. 내가 버린 인형이 일본 병정을 몰고 쳐들어와 번쩍이는 칼을 휘둘러요.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악몽들을 꾸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나요?

"그림을 몰랐어요. 오히려 시를 많이 외웠지요. '산 너머 조 서방 무엇하고 사나, 말말뚝에 말 매고 소말뚝에 소 매고, 아들 낳고 딸 낳고 그럭저럭 살지.' 이런 시 아세요?(웃음) 그러다 전쟁 나고 내가 폐디스토마에 걸려 7년을 투병하면서 학교를 제대로 못 갔어요. 그리고 열여섯 살 때인가, 학교에서 자하문 세검정으로 나가 풍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너는 내가 15년간 연구한 것을 금방 터득했구나' 하세요. 그러고는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는 거라고 하십니다. 그 마음을 화두 삼아 그림의 세계로 들어선 셈이지요."

서울대에서 송영방, 이우환 선생 등과 함께 수학하셨지요. 장욱진 선생에게서 배우셨고요.

"선생님은 삶과 그림 모두에서 우리들의 우상이었죠. 학교 그만두셨을 땐 명륜동 집에까지 쫓아가서 말씀을 들었어요. 그때까지도 그림을 못그린다는 자괴감에 그림을 그리면 늘 뒤집어놓고 나왔는데, 선생님은 늘 칭찬해주셨어요."

―파리행 항공료를 모으기 위해 졸업을 앞두고 첫 개인전을 엽니다.

"그 전시 방명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박수근 선생도 오시고, 법정 스님 처음 뵌 것도 그때였지요. 방명록에 '심여화사(心如畵師)'라는 글씨를 써놓고 가셨어요. 82년엔가 스님 계신 불일암에 갔었는데 제가 불 때서 밥하는 걸 못하니까 손수 밥도 지어주시고 국수도 삶아주셨지요. 죄송한 마음에 제가 묵던 방에 봉투를 살짝 놓고 나왔는데 나중에 보니 제 가방에 그대로 들어 있더라고요.(웃음)"

―법정 스님과의 인연으로 '파리 길상사' 문을 열게 됩니다.

"종교를 떠나 타국에 나와 사는 한국인들에게 귀의처가 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자는 뜻에서 재불 교민불자회가 주도했어요. 스님께서 후불탱화를 추상으로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셔서 내가 그린 추상화가 지금도 그곳에 걸려 있지요."

―고암 이응노 선생과도 각별하셨지요?

"대학 1학년 때 몸이 안 좋아 수덕사에서 한동안 머문 적이 있어요. 그때 이응노 선생님이 충남지역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미술 강습을 하고 계셨죠. 그때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2년 뒤 유럽으로 떠나시면서 저에게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을 그려주셨지요. 소처럼 꾸준히 말없이 그림 그리며 살라고. 빵 한쪽도 얻기 힘들 때 선생님은 파리에 동양예술학교를 열어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의 붓 잡는 법, 필법을 가르치셨죠. 불꽃처럼 살다 가신 분입니다."

1 빛의 입자(2011년作). 2 빛의 탄생(2011년作). 3 하늘과 땅(2010년作).

열매 익어 꼭지가 떨어지듯

―교사였던 아버지는 딸의 '장래 희망'란에 '세계유학'이라고 써주셨다지요?

"버려진 흉가를 꽃이 만발한 집으로 가꾸신 아버지는 7남매를 아주 자유롭게 키우셨죠. 유학 가기 전 저를 설악산에 데려가 고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뒤 '이제 됐다' 하셨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961년 봄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남의 집 다락방에 살면서 아이들 봐주며 숙식을 했어요. 나중에 병이 나서 다락방에 혼자 누워 있는 걸 우리 학교 사감이 발견하고 기숙사로 데려갔지요. 아침에 빵 두 쪽이 나오면 한쪽은 남겼다가 저녁에 먹었어요. 채소를 푹푹 삶아서 계란 하나 풀어서 먹었지요. 그림이 팔려 돈이 생기면 먹을 것보다 물감부터 샀어요."

―파리에 방혜자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게 언제입니까.

"프랑스의 미술평론가협회 회장이자 미술사가였던 피에르 쿠르티용을 만나면서죠. 67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할 수 있게 도와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왔고 작품도 거의 다 팔렸어요. 91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제 그림을 사랑하고 후원해주셨습니다."

―파리는 선생님이 꿈꾸던 빛의 도시였습니까.

"공항에 내렸을 때 파리는 춥고 어두웠어요. 뿌리째 뽑힌 연약한 나무처럼 마음 또한 늘 춥고 어두웠지요. 그 시절 깨달은 것은 고국의 뿌리였어요. 우리는 서양의 것이라면 다 좋은 것으로 받아들였던 세대잖아요. 판소리보다 모차르트와 쇼팽을 선호했고, 단원·겸재·추사보다 세잔·고흐를 열심히 공부했고요. 그런데 서양에 와서야 동양의 아름다움, 금강석처럼 빛나는 우리의 예술에 눈을 떴습니다. 부끄러웠죠."

―현지인들에게 우리 붓글씨를 가르치셨지요?

"동양 예술에 관심이 깊은 친구들이 졸라서 시작했어요. 처음엔 그림 그리고 연극하는 사람들이 오다가 정신적 고뇌를 가진 중년 부인들, 문제아를 둔 엄마가 아이들을 맡기고 갔지요. 한 번은 열여덟 살의 흑인 청년이 찾아왔어요. 부모는 이혼했고, 학교 공부에도 실패해서 빈둥빈둥 살던 아이였죠. 그런데 몇년간 붓글씨 공부하면서 온몸이 단정해지고 눈빛이 맑아져 갔습니다. 새 삶을 찾았지요."

―파리사회과학대학 인류학과 교수로 은퇴한 부군 알렉상드르 기예모즈는 저명한 한국학자이기도 합니다.

"'베르메르의 빛' 전시장에서 처음 만났어요. 1년 뒤 결혼했고 68년 한국에 인사차 들어왔어요. 남편이 공항 시멘트 바닥에서 아버지를 보자마자 넙죽 절을 하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딸 하나 잃은 줄 알았더니 아들 하나를 얻었다'며 기뻐하셨지요. 어머니는 그 불란서 거지 같은 청년을 지극 정성으로 사위 대접하셨고요. 두 달 예정으로 온 건데 남편이 계획을 바꿔 연세대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대학에서 불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의 문화·민속·종교를 연구했지요. 저더러 삼국유사도 제대로 안 읽고 뭐 했느냐며 놀렸어요. 어디 초대받아 가면 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돼요. 남편이 한국에 대해 다 얘기해주니까.(웃음)"

―불문학을 전공한 딸 사빈은 프랑스 남부의 시골에서 승마수련장을 운영하며 생태공동체운동을 한다 들었습니다.

"우리는 사빈이 박사 과정을 밟길 원했지만 낡은 책 속의 곰팡내를 맡으며 일생을 살아야 하느냐면서 시골로 내려갔지요. 1년만 있다 오겠다더니 저렇게 말 18마리와 정착해 살면서 상처받은 아이들의 정신 치유를 하고 있어요. 또래 여성들처럼 목걸이도 안 하고 치장도 안 해요. 결혼도 물론 안 했죠. 아들 시몽은 건축을 해요. 얼마 전 한국식 작은 온돌집을 지었더니 동네 사람들이 류머티즘 고친다며 몰려들 와요.(웃음)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하게 살면서 내버려두었어요. 그게 죄라면 죄지요.(웃음)"

―70대에 왕성하게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몸이 아파요. 매일 새벽 일어나 기공을 하고, 생식과 차로 아침식사를 한 뒤 화실로 갑니다. 그림을 그리면 나무에 수액이 오르듯 몸과 마음이 충만해져요."

―보통은 예술이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연습을 했어요. 뭐든지 연습을 하면 한치 한치 나아지잖아요? 그러다 보면 습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을 갖게 돼요. 슬럼프도 있지만 그것 또한 나라는 생각에 붓을 놓지 않았어요. 아이들 키울 때에도 그렸어요."

―'대화'(샘터)라는 책에 역사학자 이인호 교수와 대담을 하시면서 고도의 테크닉에만 열중하는 젊은 작가들을 걱정하셨습니다.

"영성, 깊은 정신세계는 나이에서도 오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됩니다. 명예나 그림값 같은 외적인 것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자기 내면의 빛을 찾아서 가야 합니다."

―나이 듦, 인생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나이테는 아름답지요. 열매가 무르익어 꼭지가 똑 떨어지듯이 생을 마무리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