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5월 15일 경성시 용산경찰서 뒷마당에 부녀자 30여명이 몰려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경찰이 거리에 돌아다니는 개, 이른바 야견(野犬) 60여 마리를 붙들어 왔더니 "식구와 가티 길으고 잇던 사랑하는 개를 빼앗긴" 주인들이 찾으러 온 것이다. 부인네들은 "자기네의 개 이름을 부르며 엉엉 우는 이가 만헛스며" 심지어 "(내 개를) 죽인다면 우리 식구들이 밧는 정신상 고통이 클 것이라고 애원하는 등 용산서는 한참 동안 개의 구명 운동으로 바뿐 초상집 가텃다." 결국 30마리는 주인 품에 안겼다.(조선일보 1940년 5월 17일자)

80여년 전 이 땅에서 개가 받는 대접은 극과 극을 오갔다. 집 지키는 용도로만 개를 기르던 조선시대와 달리 '애견당(愛犬黨)'도 늘고 있었지만, 주인 품을 떠난 개는 경찰의 '토벌' 대상이었다. 1920년대에 경찰이 정기적으로 실시했던 떠돌이 개 일제 단속이 이름하여 '야견박살(野犬撲殺)'이었다. 당시 지면엔 '몇월 며칠에 야견박살이 실시되니 개 주인들은 피해가 없도록 개를 잘 묶어 으라'는 경고성 예고 기사가 많을 땐 한 달에 두어 번꼴로 보인다. 한 번에 보통 3, 4일씩 이어지는 단속 때 주인 없이 돌아다니거나 목에 주인 성명 패찰을 붙이지 않은 개는 모두 경찰서로 끌려갔다. 1924년의 경우, 1월부터 6월까지 전국에서 경찰에 붙들린 야견이 1만6130마리였다.(1924년 9월 13일자)

'요새 류행하는 애완견의 종류'를 소개한 조선일보 1937년 10월 14일자 기사. 당시 페키니즈, 푸들 등 작은 애완견까지 기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경찰까지 나서 개를 취체(取締·단속)한 것은 사람을 물거나 광견병을 옮기는 등 많은 해를 끼쳤기 때문이었다. 1936년 경성에 사람이 기르는 개가 약 4000마리였는데 1년간 409마리가 사람을 무는 사고를 일으켰다. 10마리에 한 마리꼴로 사람을 문 셈이다.(1937년 2월 17일자) 사고가 하도 잦자 경찰은 1937년 3월부터 한동안 매월 두 차례, 한 번에 6일간씩 강도 높은 야견박살을 실시하기도 했다. 한 달의 거의 절반 동안 소탕 작전을 벌인 것이다.(1937년 2월 17일자)

1920년대 사회면에 시리즈처럼 이어지던 '야견박살' 기사는 1930년대로 들어가면 줄어든다. 대신 애완견 이야기가 신문 가정면에 심심찮게 보인다. "요사히는 서양종 개를 기르는 사람이 만습니다"라며 친, 페키니즈, 푸들, 그레이하운드, 폭스테리어 등 20여종을 사진과 함께 특집으로 소개하기도 했다.(1937년 10월 14일자) 갑술년(甲戌年) 개띠 해를 맞아 신년특집호로 꾸민 1934년 1월 1일자엔 가상의 '견공(犬公) 좌담회'도 실었다. 이 기사에서 개 4마리는 "달리 하는 일 업시 주인집 색시 무릅 우에나 그러치 안으면 늘 방구석에서만" 지낸다고 상팔자 같은 개팔자를 전하기도 하지만, "섯불리 촐랑거리고 다니다가 술취한 사람들에게 엉덩이가 부러지도록" 맞는가 하면 "야견박살에 걸려들어 죄 업시 사형을" 당하는 신세를 탄식했다.